매경칼럼

인플레, 목숨 걸고 [손현덕 칼럼]

입력 2022/06/15 00:07
수정 2022/06/15 05:54
사악하고 고약한 병원균
그래서 초기에 잡아야 한다
멈칫멈칫하다간 피해 커져
50년전 S는 그렇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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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 경제의 핫이슈로 떠오른 인플레이션은 30년도 더 지난 수습기자 시절의 기억을 소환했다. 1988년경이다. 당시 물가동향 발표가 나올 때면 늘 1면 톱 자리를 비워놓았다. 1986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한 경상수지 흑자로 시중에 돈이 넘쳐나고 나라 전체가 소비열풍에 휩싸였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한국 경제는 인플레라는 암초에 부닥쳤다. 경제기획원을 출입하는 선배 기자가 당시 물가 기사를 쓰는데 리드 문장에 힘 좀 줬다. "이제 반(反)인플레 선언을 해야 할 때다"라고. 고지식한 데스크에 의해 가차 없이 난도질당했지만 두고두고 당시의 자신의 글에 자부심을 가졌던 선배였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인플레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다. 만약 1988년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면 그는 인플레를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어림잡아 환갑이 넘지 않은 대부분의 한국인들. 그들에게 금리는 아무리 날뛰어도 한 자릿수이며 생필품은 사재기라는 말이 왜 있는지조차 이해 안 될 정도로 안정세였다. 가격이 오르는 재화가 있다면 부동산, 그것도 강남 언저리의 아파트가 유일했다. 경제학자들 역시 인플레를 무시했다. 기껏해야 일시적 현상이며 인플레가 생긴다 해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미국 중앙은행의 전설인 폴 볼커가 특효약을 개발했다. 그게 금리 인상이다. 물가가 좀 오를 기미가 보이면 금리 올리면 된다는 안이함이 경제학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다르다. 어 어 하는 사이에 통제 불능의 상태까지 왔다. 인플레이션과 함께 경기침체까지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공포가 엄습한다. 2주 전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자신만만하게 트윗을 날렸다. "인플레에 대한 나의 계획은 간단하다. 첫째, 중앙은행에 맡긴다. 둘째, 생활물가를 낮춘다. 셋째, 재정적자를 줄인다." 이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처방도 바이든의 트윗과 다를 게 없고 이에 대해 시장의 반응이 신통치 않은 것도 매한가지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방선거 승리에 취하는 걸 경계하면서 "우리 경제는 지금 태풍의 권역에 들어가 있다"고 한 게 인플레를 인식한 거라면 다행이다. 인플레는 사악하고 고약하고 지독한 병원균이다. 오래전 맞은 백신은 유효기간이 만료돼 머릿속으로는 방어를 할지 모르나 면역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인플레는 가치의 손실이다. 그래서 사악하다. 인플레는 화폐를 들고 있는 모든 사람의 재산을 약탈하는 범죄다. 그것도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을 더 힘들게 하는 역진세와 같다. 인플레는 불합리의 승리다. 그래서 고약하다. 임금근로자와 채권자의 구매력을 고용주와 채무자에게 이전시킨다. 자원배분의 왜곡이다. 인플레는 지속성이 강한 대표적 경제지표다. 그래서 지독하다. 한 번 발생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이를 입증할 다수의 논문이 존재한다.

인플레에는 늘 '기대 인플레'라는 내생적 DNA가 따라붙는다. 국민들 마음속에 물가가 계속 오를 것 같다는 심리가 자리 잡으면 인플레는 가속도를 낸다. 그래서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무지막지하게 금리를 인상하는 '볼커의 해법'이 탄생했다. 문제는 경제를 망가뜨린다는 점. 항암제와 같다. 병을 치유하는 데는 큰 효과를 못보고 몸은 급속도로 허약해진다. 겁에 질려 멈칫멈칫. 스몰스텝으로 가는 이유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은 초장에 빅스텝을 거부하다 등장한 것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주 말 "인플레 파이터로서 중앙은행 본연의 역할이 다시금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래서 30년도 더 지난 기억을 소환해 다시 쓴다. 이제 반(反)인플레 선언을 해야 할 때라고. 경제팀은 목숨 걸고 인플레를 막아야 한다고.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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