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외교의 핵심 어젠다로 제시한 '글로벌 중추국가'는 뭔가? 대강 합의된 정의(定義)는 이렇다. '세계의 자유, 평화, 번영에 기여하는 선도적 국가'. 그럼 세계는 뭐냐는 질문에 정부는 '인도·태평양 지역과 그 너머'라고 답한다.
꼬치꼬치 따지고 들자 신경질적인 반문이 들어온다. "그럼 당신의 정의는 뭐냐?"고. 나는 이렇게 답했다. "기자들은 지금까지 외교에 있어 다자회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늘 기사는 양자회담에서 나왔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세계 공동의 이슈인 다자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글로벌 중추국가"라고.
북한 핵·미사일, 한일 간 위안부 갈등, 한미동맹, 중국의 한한령…. 이런 게 소위 기사 꼭지였지 민주주의, 테러방지, 보건, 인프라 투자, 난민구호 이런 어젠다는 관심 밖이었다. 이제 와서야 기후변화 정도가 겨우 데스크로 올라온다.
윤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첫 해외 순방에 나섰다. 양자가 아닌 다자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 외교장관이 간 적은 있어도 대통령이 가는 건 처음이다. 나토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하는 회의에 아시아·태평양 네 나라를 초대했다.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은 "세계 무대에서 글로벌 리더들과 공동 관심사를 논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평가한다.
반대 목소리가 작지 않다. 중국을 경계하고 러시아를 규탄하는 회의에 들러리를 설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다. 실제 중국이 딴지를 걸고 있다. 그러나 그걸 겁내 좌고우면할 일은 아니다. 초청을 거절해 스스로 왕따를 자초하는 꼴이다. 득실을 따져 득이 크면 가야 한다. 윤 대통령이 엊그제 마드리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이유다.
언론은 한·미·일 정상회의를 주목한다. 세계 주요국 정상 10여 명을 각각 만나 실리외교를 추진하는 데 방점을 둔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건 윤 대통령이 오늘 밤 10시 나토 정상회의 무대에서 방출하는 메시지다.
자유와 평화, 번영이라는 가치를 수호할 의지가 얼마나 있는지, 그게 진심인지, 우리와 같은 편인지, 참가국 정상은 말 한마디 한마디를 세밀하게 뜯어볼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 역시 똑같은 관점에서 윤 대통령의 발언을 분석할 것이다.
많은 외교 전문가들이 반(反)중국, 반(反)러시아 기조를 분명히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한반도가 지닌 특수성을 감안하면 일리가 있다. 당연히 발언은 신중하고 정교해야 한다. 그렇다고 물에 물 탄 듯 얼버무려선 곤란하다. 이게 더 큰 리스크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이 우선적으로 신경을 써야 할 나라는 중국과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과 나토 회원국이다. 그들이 대한민국을 초청했다. 오해 살 말은 안 해야 하지만 본질을 피해가면 안 된다.
침략전쟁을 규탄하고 인류의 평화와 번영, 자유를 지키기 위한 국제 연대에 동참한다는 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 말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작년 5월 한미정상회담 같아서는 안 된다. 일부 디테일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도 있지만 침묵도 메시지임을 인식해야 한다. 조태열 전 유엔대사는 "참모진은 남은 시간 머리 싸매고 단어 하나하나를 다듬어야 한다"고 고언한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당연히 우리의 현안을 말할 것이다. 북핵 문제에 대해 참가국의 광범위한 지지를 호소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참가국 정상들이 "대한민국은 우리 문제는 강 건너 불 보듯 하면서 도와달라는 소리만 하네"라는 반응이 나온다면 그거야말로 재앙이다.
글로벌 중추국가로 가는 길에 레드카펫은 없다. 지금까지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로 왔다면 지금부터는 8차선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한다.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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