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매경데스크] ESG의 또다른 핵심, 다양성

입력 2022/07/04 00:07
이사회 여성할당, 세계적 추세
대형IB·운용사도 다양성 요구

8월 시행 '여성 할당' 계기로
여성인재 활용방안 모색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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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9명을 키우면서 금융계 최고위직까지 올라가 영국 워킹맘들 사이에서 전설적 인물이 된 헬레나 모리시. 2010년 당시 골드만삭스 이사였던 모리시는 남녀평등에 대한 연구 보고서 하나를 보게 됐다. 연구 결과는 어떤 집단에서 소수 그룹이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전체 그룹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 이상이어야 하는데, 당시 영국 회사들이 임원진의 10~15% 이상을 여성으로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충격을 받은 그는 '영국 내 상장기업 이사의 30%는 여성이어야 한다'는 목표로 '30% 클럽'을 만들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과 세계 최대 연기금 일본 정부연금투자펀드 등 글로벌 큰손들이 '30% 클럽'에 속속 가입한 데 힘입어 2018년 '30% 클럽'은 1차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


FTSE100 기업의 여성 이사 비율이 30%를 넘어선 것이다.

블랙록 등 운용사들은 투자 기업 이사회와 임원진에게 성별 다양성을 주문했고, 투자 기업이 합리적인 기간 내에 다양성을 개선하지 못하면 특정 이사에게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블랙록은 지난해까지 세계 975개 기업, 1862명의 이사에게 반대표를 행사했는데 가장 큰 이유가 '다양성 부족'이었다.

'30% 클럽'보다 앞서 노르웨이는 2008년 상장기업 이사회의 40%를 여성으로 의무화하는 할당제를 도입했다. 이후 5년 동안 10여 개 국가가 30~40% 여성 할당제를 도입했고 유럽연합(EU)도 지난 6월 상장기업 이사회 구성원의 40%를 여성으로 채우도록 하는 데 합의했다. EU 27개 회원국 상장기업들은 2026년 6월까지 합의를 이행해야 한다. 미준수 기업에 대한 제재도 도입된다.

물론 할당제 도입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자격을 갖춘 여성의 풀이 작다는 반발이 빗발쳤고, 한 사람이 10여 개 회사 사외이사를 맡는 등 특정 여성이 자리를 독식하는 '황금치마(golden skirt)' 논란도 일었다.


여성 이사를 추가 선임하는 대신 이사회 총인원을 줄여 여성 비율을 높이는 편법이 등장했고, 여성 이사 선임 대신 상장폐지를 선택한 기업까지 나왔다. EU의 이번 합의안도 처음 제안이 나온 것이 2012년이었으니, 도입 결정까지 무려 10년이 걸린 셈이다.

10년을 표류하던 EU의 논의가 급진전된 것은 EU 주요 상장기업 이사회의 여성 비중이 31.3%까지 높아진 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 기업들이 빠르게 여성 이사 비율을 높여간 것은 단순히 여성을 배려해서가 아니다. 초기 우려와 달리 여성 이사 선임이 재앙이 아니었고, 오히려 다양성 확보와 혁신, 성장에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수익'을 좇는 자본시장이 다양성을 강조하는 속내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래리 핑크 블랙록 최고경영자(CEO)는 "다양한 젠더, 민족, 사고방식, 경험을 가진 이사회는 수준 높은 의식을 갖게 된다. 새로운 위협을 간과할 가능성이 작고, 성장 기회를 더 잘 포착할 수 있다"며 다양성을 강조했다. '리먼 브러더스'가 '리먼 브러더스&시스터스'였다면 '리먼 사태'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한국도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기업은 이사회의 이사 전원을 특정 성(性)으로 구성하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한 개정 자본시장법이 다음달부터 시행된다. 법 시행을 앞두고 여성 사외이사 영입이 늘고 있다.

하지만 여성 임원 확대는 제도 개선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이사회에 여성을 끼워 넣는 식이 아니라, 여성 이사를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교수나 변호사 등 특정 직업군 여성만 활용하는 '황금치마' 부작용도 피해야 한다.

'쓸 만한 여성이 부족하다'고 불평만 하는 기업은 투자 받기도 어려운 시대가 오고 있다. 다양성 확보는 ESG 경영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은아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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