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허연의 책과 지성] 엄마는 덫에 걸렸다. 아버지와 결혼했다…달인의 한 마디

입력 2022/08/06 00:06
윌리엄 트레버 (1928~2016)

"단편은 누군가의 삶 혹은 관계를 슬쩍 들여다보는 눈길"
인간의 욕망과 연약함 담담하게 그려낸 단편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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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덫에 걸렸다. 아버지와 결혼했고, 생활비를 받기 위해 아버지와 잠을 잤다… 아버지도 역시 덫에 걸렸다. 아버지는 밤마다 문지기 유니폼을 입고 집을 나섰다."

불행한 부부를 이렇게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욕설 한마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가장 잔인하게 불행한 부부관계를 묘사한 문장이다.

아일랜드 출신 작가 윌리엄 트레버는 단편의 지존이다. 그가 덤덤하게 그려내는 인물 군상들은 한 명 한 명 소설 속에서 극적인 주인공으로 살아 움직인다.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나 담담하다.

"내 소설은 인간 삶의 여러 면을 비춘다. 그러나 특별히 의식해서 그렇게 쓰진 않는다. 나는 그저 이야기꾼이다."

트레버는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안톤 체호프과 제임스 조이스를 계승한 단편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한국보다는 영어권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상복은 없었다.


살아생전 맨부커상과 노벨문학상의 단골 후보였을 뿐이다. 그는 소설가들의 소설가였다. "트레버만 한 작품을 쓸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다"고 말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았다.

그의 소설에는 한결같이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들, 외로움과 슬픔에 젖어 사는 사람들,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들, 무시당하거나 오해받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트레버의 순탄치 않은 개인사가 그에게 사람 보는 돋보기를 쥐어줬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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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버는 1928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가톨릭이 다수인 아일랜드에서 개신교를 믿었다. 그는 어린 시절 내내 배척당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느끼며 살았다. 생활고도 한몫했다. 안정되지 못한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소년 시절 학교를 13군데나 옮겨 다녀야 했고, 경제난 때문에 결국 고국을 떠나 영국에서 이민자로 살아야 했다.

트리니티칼리지에서 역사를 공부한 그는 역사교사로 근무하면서 틈틈이 조각가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서른여섯 살이 되던 1964년 '동창생들'을 발표하면서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선다.

트레버는 단편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지니고 살았다. 그는 단편을 "누군가의 삶 혹은 인간관계를 슬쩍 들여다보는 눈길"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단편의 매력은 쓰는 동안 인간관계의 길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좀 풀어서 말하면 단편은 인간과 인간관계의 단면을 촌철살인으로 보여주는 가장 적합한 장르라는 뜻이다.

그는 인간의 욕망과 연약함을 그리지만 감정 과잉이나 치우침이 없다. 그는 등장인물과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최소한의 단어를 사용해 그들을 그린다.

"떠난 자리에는 마리와 나눈 사랑의 경이로움이 남았다… 누군가의 멸시도… 방 두 개짜리 더러운 아파트도 마리와의 사랑이 선물한 경이로움을 퇴색시키지는 못했다."

트레버도 장편을 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쩌다 가끔 장편을 쓴 단편작가"라며 단편작가임을 자랑스러워했다.

※ 문화선임기자이자 문학박사 시인인 허연기자가 매주 인기컬럼 <허연의 책과 지성> <시가 있는 월요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허연기자의 감동적이면서 유익한 글을 쉽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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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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