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허연의 책과 지성] 여긴 나 밖에 없어…그런데 난 짐승이야

입력 2022/08/13 00:06
윌리엄 골딩 (1911~1993)

"여기엔 오직 나밖에 없어. 그런데 나는 짐승이야"
무인도 표류 소년들에게서 악마성 찾아낸 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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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너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오직 내가 있을 뿐이야. 그런데 나는 짐승이야."

사람들은 흔히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을 '15소년 표류기'의 타락 버전이라고 말한다.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는 섬에 표류하게 된 소년들이 합심해 악당을 물리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해피엔딩을 담았다. 하지만 '파리대왕'은 결이 좀 다르다. '파리대왕'은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이 점차 인간성을 상실하면서 짐승이 되어가는 모습을 그린다.

미래 어느날, 여섯 살에서 열두 살에 이르는 영국 소년 12명이 태평양 한복판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소년들은 투표를 통해 잘생기고 합리적인 랄프를 지도자로 뽑는다. 랄프는 봉수대를 짓고 불을 피워 올려 구조 요청을 보내는 걸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한다.


하지만 대장 자리를 노리는 성질 급한 빨간 머리 잭의 생각은 다르다. 잭은 은신처를 짓거나 불을 지키는 것보다 멧돼지를 사냥해 고기를 먹는 데 더 치중한다. 소설은 둘의 대결을 축으로 수많은 질문을 던지면서 전개된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으며 소름이 돋는다. 나를 비롯한 인간들에게서 문득문득 느껴졌던 야만성을 만나기 때문이다.

'파리대왕'도 '15소년 표류기'처럼 소년들이 구출되면서 끝을 맺는다. 하지만 '파리대왕'에서 살아남은 소년들은 승리자가 아니라 인간성의 밑바닥을 본 피폐한 영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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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모든 과정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며, 세상살이는 발걸음을 조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다."

문명과 동떨어진 곳에서 고립된 소년들은 차츰 즉흥적이게 되고 야만화되어간다. 한 치를 알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내몰려 극도의 공포에 시달리는 소년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이성이 아니라 힘이다. 소년들은 '힘'이라는 가치에 몰입하면서 문명사회에서 가지고 살았던 보편적 가치를 하나둘씩 버린다.


소설이 출간된 건 1954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야 팔리기 시작했다. 소설이 주목받은 건 독서토론에 단골로 등장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소설 자체가 문명의 취약함과 인간에게 내재된 악마성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다루고 있기에 영미권 학교를 중심으로 '파리대왕'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수업이 늘어난 것이다. 골딩은 책이 출간되고 30년이 지난 198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11년생인 골딩은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다 해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때 목격한 인간의 사악한 내면을 담은 작품이 '파리대왕'이다.

"한쪽에는 사냥과 술책과 흥겨움의 세계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좌절된 상식의 세계가 있었다."

소년들은 합심해 규칙을 지키면서 구조되는 것과 섬을 파괴하고 배를 채우면서 오늘을 사는 것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지금 우리도 그와 흡사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지 않은가.

※ 문화선임기자이자 문학박사 시인인 허연기자가 매주 인기컬럼 <허연의 책과 지성> <시가 있는 월요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허연기자의 감동적이면서 유익한 글을 쉽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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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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