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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책과 미래] 연애 소설 쓰는 노인

입력 2020.05.2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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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소설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코로나19에 감염돼 세상을 떠났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작가다.

평생 독재와 맞서 싸운 자유의 수호자였고 인간의 탐욕과 무분별한 개발에 맞선 생태주의자였다. 또 "나의 조국은 스페인어"라면서 오직 문학의 시민이기만 원한 코스모폴리탄이기도 했다.

한 작가의 죽음에 대한 최고의 애도는 책장에 꽂아둔 책들을 꺼내서 먼지를 털어낸 후 천천히 읽는 것이다. 있는 책은 새로 읽어 메모를 더하고, 없는 책은 마저 마련해 생각의 재료로 삼는다. 한 차례 작품을 모두 읽어 기억의 주름을 깊게 파고 나면, 홀로 천도제를 지낸 느낌이다. 비로소 작가를 떠나보낼 마음이 선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의 한 유대인 수용소 한구석의 돌멩이에 새겨진 글귀다. 닥쳐온 죽음에 좌절한 마음이 스스로를 증언 중이다. 그러나 이 '소외'된 언어는 한 줄로 새겨진 희망이다.


누군가 이어받기 때문이다. 세풀베다는 문학의 임무가 이러한 '내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데 있다고 여겼다. 인간의 탐욕에 짓밟히고 망각당한 존재들의 입술이 되고자 했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아마존 숲의 개발 과정에서 새끼를 잃은 살쾡이의 복수극을 다룬다. '지구 끝의 사람들'은 남극해 부근에서 불법 고래잡이를 하는 일본 포경선에 맞서는 노인의 이야기다. '악어'는 악어가죽 때문에 아마존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한 부족을 말살시킨 가죽회사 사장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추적한다.

자본은 흔히 맹목이다. 개발과 착취를 동의어로 쓰는 버릇이 있다. 눈앞의 이익을 추구할 뿐 생태계를 고려하지 않는다. '물에서 온 사람'인 아나레족이 보기에, 악어를 밀렵하는 이들은 '물을 증오하는 사람'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존재들을 공격하고, 그 대가를 자신의 죽음으로 치른다. 세풀베다가 개척한 '생태주의 스릴러'의 중심 서사다.


그마저 희생양으로 삼은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 스릴러의 한 에피소드라는 게 아이러니할 뿐이다.

그러나 재앙이 인간을 패배시키지는 못한다. 세풀베다는 말한다. "형제여, 우리는 앞으로 열 번은 더 이겨낼 것이다." 삶이란 본래 "의심, 좌절, 재난으로 가득 찬 길"이지만, 동시에 "숨이 끊기는 순간까지 열정적으로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세풀베다에게 산다는 것은 고통의 서사를 긍정의 서사로 고쳐 쓰는 일, 즉 '생쥐와 고양이가 친구가 되는' 우애와 연대의 기적을 일으키는 일이다. 세풀베다의 혀를 빌려 자연은 속삭인다. 탐욕은 절망이고, 사랑이 희망이다. 얼마나 단순한가. 진리는 늘 명증하다. 지구를 사랑했던 '연애 소설 쓰는 노인'의 명복을 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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