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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세상사는 이야기] 귀하고 애틋한 '나의 보물'

입력 2020.08.0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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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로원 어르신 입맛 찾아준
장 담겼던 손때 묻은 장독들
엄마의 다정한 온기 가득한
90년된 작은 오동나무 함…
오롯이 삶 품어낸 것들 소중
내가 지키는 여백서원 뜰에 들어선 사람들이 제일 먼저 보고 놀라는 것은 장독이다. 다들 저기에 된장 고추장이 다 차 있느냐고 묻는다. 너른 한옥 뒷마당에 가슴까지 올라올 만한, 세월이 그대로 보이는 큰 장독들이 좌악 늘어서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담긴 건 없으나 아주 귀한 것이다. 먼 곳에서 한 개씩 담요에 고이 말아 두 차례 트럭에 조심조심 실어 왔다. 평생 의탁할 곳 없는 노인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오신 어떤 분이 이제는 본인이 연로하셔서 긴 세월 담그던 된장을, 양로원의 많은 노인들의 먹거리가 되고 재원도 되었을 그 공든 된장을, 더는 담지 못 하시겠다며 보내주셨다. 손때 묻은 것이라 갈 곳을 나름 물색하셨을 것 같아 그만큼 더 귀하게 간수하고 있다.


건물 안 한실에는 보료가 놓여 있는데 참으로 우연하게도 바로 그분이 아직 젊었던 때, 즉 잘되는 사업을 접고 양로원을 세우기 전에 만드신 것이다. 40여 년 전 유난히 솜씨 좋은 손에서 고운 충무 누비 보료를 건네받은 일이 있을 뿐 그전에도 그 후에도 만난 적 없던 분이 어찌어찌 서원을 아시고 재작년에 장독을 주셨다. 방 안에는 보료 외에도 크고 작은 함이 두 개 놓여 있는데, 작년에 또 어떤 분이 예전에 아들 결혼 때 쓴 것인데 이제 둘 곳이 없다면서 가져오신 것이다. 그런데 자개가 박힌 그 단아한 함도 보료 만들던 댁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놀라운 얘기였다. 한 분의 손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것도 놀랍고, 바로 그것을 서원으로 들고 오신 분도 놀랍고. 그런데 며칠 전 이사를 앞둔 친구가 이불 보따리 세 개를 보내왔다. 보료와 방석들이 나왔는데, 그 역시 세상에나 바로 같은 분이 만든 고운 충무 누비였다. 방 안에 있던 것과 색만 조금 달랐다. 놀라운 우연의 연속이었다. 한 손에서 나온 것들이 긴 세월을 지나 서원의 한 방에 다 모였으니.

이 방에는 작은 오동나무 함도 있다. 내 어머니가 시집 오실 때 따라온 것이다. 예전에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


얼른 자라는 그 나무로 딸이 시집갈 때 함이나 장롱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90년 된 그 오동나무 함에도, 작년에 온 충무 자개함에도 질긴 한지 종이가 다 해지도록 읽은, 내 어머니의 필사본 두루마리들이 가득 들어 있다. 고생만 하다가 가신 분의 글이 아름다운 함에 담겨 있으니 참 좋다.

그 곁에다 꽃신 한 켤레를 놓아 본다. 말표 검정 고무신에다 꽃을 몇 송이 그려 넣은 것이다. 장독을 받으러 갔을 때 주시는 분이 신은 고무신이 눈에 밟혔었다. 손끝이 닳도록 땅을 일구어 저 많은 장독에 장을 담고,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을 돌보며, 당신 자신을 위해 쓴 돈이 저 고무신 값밖에 뭐가 별로 더 있겠나 싶어서였다. 실없이, 요즘은 고무신이 없는데 곱다고 했더니 나중에 우편으로 나도 신으라고 한 켤레가 와서 놀랐다.


물론 너무 귀해서 신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게 한 손에서 온 것들이 긴 세월을 두고 흘러 흘러 와서 낯선 한 방에서 또 다른 것과도 어울리며, 가지런히 놓인 것을 보자니 이것들이 다 어쩌면 풀꽃같이 스러질 한 생애를 증언하기 위해 제 발로 모여든 듯하고, 이 방이야말로 다름 아닌 기념관일 것 같다. (문득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스쳐 지나간다. 어느 지자체에서 큰돈을 들여 멋진 문학관을 덩그러니 지어 놓았는데, 내용을 채울 길이 없어 난감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저절로 모여 사연을 더하는 애틋한 것들-참 귀하고 아름답다. 그 뒤에 어려 있는 생애는 더욱 그렇다. 빛나는 재주를, 눈에 뜨이지 않는 것에, 실은 더 빛나는 것에다 바친 생애야 더더욱. 나라도 나서서 조금 더 지켜주고, 아껴주고, 간직하고 싶다. 서원까지 와 닿은 이런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아 그걸 담은 방들이 모일 작은 마을을 만드는 일을 지금 시작하고 있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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