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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매경춘추] 휴가와 재난 사이

입력 2020.08.07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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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를 다녀왔다. 깨끗한 바다와 작은 섬들은 물론이고, 금강산이 시작된다는 깊은 산속에 위치한 사찰과 정자 그리고 초현실주의 미술가의 이름을 딴 호텔과 박수근미술관도 들렀다. 미술관에선 마침 꼭 보고 싶었던 박미화 작가의 박수근미술상 수상 기념전이 열리고 있었다. 사실 이 작가 작품을 나는 딱 한 점밖에 본 적이 없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2018년 구입한 소장품을 모아 전시했던 신소장품전에서 '어머니'라는 작품을 본 후, 다른 작품들도 살펴보리라 마음먹었지만 좀처럼 기회를 만들지 못했더랬다. 등신대 크기 나무를 깎아낸, 거의 추상에 가까운 작품이 제목의 구체성과 부딪혀 흥미롭게 느껴졌는데, 박수근미술관의 현대미술관과 파빌리온에 가득 찬 작품들 덕분에 작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휴가에서 돌아오니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고 전국을 강타한 수해 뉴스가 이어진다.


강원도도 산사태와 침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소식이 들린다. 직전에 며칠이라도 있었던 지역이니 더 신경 쓰이는 게 인지상정이겠지만, 휴가와 수해라는 조합을 처음 겪는 게 아니라 유독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2018년 12월 브라질로 휴가를 다녀왔었다. 미나스제라이스주의 브루마지뉴에 있는 이뇨칭(Instituto Inhotim)으로 시작한 여행이었다. 5000에이커 열대림에 펼쳐져 있는 이뇨칭을 한마디로 정의하긴 쉽지 않다. 간단히 말하면 야외 식물원과 미술관으로 꾸며진 거대한 테마파크라 할 수 있겠지만, 지도를 들고 카트로 이동하며 각종 동식물과 현대미술 작품 및 프로그램, 건축물을 찾아다니다 보면 도시나 섬의 공공미술 축제 혹은 확장된 비엔날레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기도 했다.

자비로 방문한 관광객답게 이뇨칭을 만끽했지만 문제는 돌아온 이후 생겼다.


2019년 1월 브루마지뉴에 계속된 집중호우로 댐이 붕괴하면서 인구 3만2000명 소도시에서 270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터진 것이다. 이뇨칭은 재난을 비껴 갔지만, 거대한 진흙더미로 뒤덮인 참혹한 마을 모습을 해외 뉴스로 목격한 다음에는 이뇨칭을 더 이상 '순수하게' 즐길 수 없게 됐다. 단 한 번 방문객도 이 사건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이뇨칭에 대한 맥락이 생겨난 셈인데, 과연 이뇨칭은 재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홈페이지를 방문해보니 마침 코로나19로 휴관 중이라는 안내가 떠 있다.

우리 인생에서 여름휴가와 수해가 생각보다 머지않듯이 현대미술과 재난도 그렇다. 글을 쓰기 직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박미화의 또 다른 작품 '이름'을 수장고에 내려가서 살펴봤다. 나무 판 위를 덮은 커터 칼자국 생채기는, 새삼스레 개인을 뒤덮어버린 재난의 또 다른 이름처럼 읽혔다.

[백지숙 서울시립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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