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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책과 미래] 여성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다르다

입력 2020.08.08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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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가에 SF소설이 붐이다. 작년 6월에 나온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의 판매량이 12만부가 넘었고, 올해 상반기 교보문고 집계에서는 SF소설 판매량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SF가 이렇게 우리 독자의 사랑을 받은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SF 문학의 주요 갈래 중 하나가 페미니스트 SF소설이다. 흔히 SF 하면 우주 탐험과 정복 이야기, 즉 마초들이 탐욕과 만용을 뽐내는 '우주 서부극'을 떠올린다. 그러나 여성의 꿈과 SF가 만나면 마초 SF와는 다른 세계가 출현한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에는 전쟁과 정복의 서사가 아니라 우애와 평화의 서사가 나타난다.

'허랜드'(아르테)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이다. 이 소설은 아마존 밀림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여성 국가를 배경으로 한다.


남성들이 전쟁 등으로 인해 멸종, 여성들은 단성 생식을 통해 여성만 낳아 사회를 유지한다. 2000년 세월이 흐르자, 허랜드에는 위계 없는 평등, 억압 없는 민주주의, 물욕 없는 자산 공유, 분쟁 없는 평화, 생태적 조화 등이 실현된다. 육아는 공동으로 하고, 아이들은 고귀하게 태어나고 풍요하고 자유롭게 자라난다.

후대의 관련 소설들도 흔히 이 '남성 없음'의 유토피아를 물려받는다. 조애나 러스의 단편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는 전쟁과 역병으로 남성이 절멸된 와일어웨이 행성이 배경이다. 이 사회의 여성들은 공동 육아, 공동 노동을 통해 일체의 사회적 제약에서 해방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간다. 지구 남성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의 배경은 300년 후 지구. 그사이 남성은 멸종되고, 여성은 복제로 사회를 이어간다. 행성 탐사에 나선 과거 지구의 남성 셋이 우연히 이 세계로 빨려든다.


간신히 구출된 이들이 마초 기질을 드러내자, 여성들은 지구에는 남성이 필요 없다는 결단을 내린다.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시공사) 배경은 평소 무성으로 살다 한 달에 며칠 남성 또는 여성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양성사회 게센 행성이 배경이다. 남성 또는 여성의 이분법이 사라지자 강자와 약자, 지배와 피지배, 주인과 노예 등도 사라지고 사회적 특권과 부담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된다.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포도밭출판사)에서 러스는 말한다.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SF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며, 유토피아를 향한 충동 뒤에는 누군가의 고통이 감춰져 있다." 여성의 고통을 부추기고 사회적 약자를 조롱하는 말이 횡행 중이다. '더불어 혐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여름휴가에 이 작품들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남성 없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공생하는 유토피아를 우리는 꿈꿀 수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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