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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매경춘추] 집을 떠나다

입력 2020.09.17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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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로 외출하는 일이, 사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친구와 차 마시며 대화 나누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코로나19 방역으로 누구나 할 것 없이 일상의 어떤 부분들을 조금씩 포기하면서 생활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작년 봄에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라는 전시를 기획했다. 대만과 한국 현대미술을 '이동'과 '이주'라는 주제에서 살펴본 전시였다. 전시 제목은 한국에서 이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김현미 교수의 동명 책 제목에서 따왔다. 대만과 한국 예술가들은 식민 체험과 분단, 독재 통치, 산업화 등 사유로 '이동'하거나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자국 역사를 들춰냈다. 그리고 '이주 노동' '결혼 이주'로 혹은 '난민'으로서 지금도 계속해서 움직여야만 하는 대만과 한국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했다.

정재철 작가는 작가 선정이 거의 마무리돼 가던 즈음에 전시에 합류했다.


작가 18명이 모두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정재철은 사람들이 쓰다 버린 '쓰레기'에 집중하고 있었던 점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정재철의 날카로운 시선이 해양 쓰레기에 꽂힘으로써 만들어진 것이 '블루오션 프로젝트'다. 그가 수집한 물건들은 전시장에서 예술적 오브제로 변모했다. 폐기된 어망, 거대한 스티로폼, 유리병, 플라스틱병과 같은 각종 용기들, 아이들 장난감 등이 이 예술가 손에 의해 전시물이 된 것이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해양 쓰레기가 어디서 흘러와 어느 바다 위를 떠돌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해류 지도도 직접 그렸다. 그의 지도 위에서 바다는 육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곳에는 이 나라 저 나라 사이에 국경도, 온대와 냉대와 열대 기후대도 불분명한 그저 하나로 통하는 바다가 있다. 인간이 생산해 냈지만 결국에는 인간의 통제력에서 멀리 벗어난 쓰레기들이 그 푸른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닌다는 사실을 작가는 고발하고 싶었던 것이다.


"삶이 예술이고 여행이 미술이다"라고 하면서 전 세계를 누비며 다닌 길 위의 예술가 정재철은 이렇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세상 속에 감춰진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작가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한글이 선명하게 인쇄된 폐현수막을 지니고 실크로드로 들어가 현지인들에게 나눠주고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추적하는 프로젝트를 7년 동안 수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사람과 장소의 관계 맺기'라고 규정했다. 그러던 그가 지난 8월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의 진실을 향해 언제나 집을 떠날 수 있었던 용맹했던 예술가의 요절에 미술계가 침통한 것은 물론이다. 코로나19 시대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정재철의 문제의식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리고 그의 자유로웠던 예술가의 삶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최은주 대구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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