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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매경춘추] 1년차 시어머니

입력 2020.09.2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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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에선 60년 차 막내딸이고, 시댁에선 35년 차 맏며느리이며, 1년 차 시어머니가 현재 나의 위치이다. 어느 역할이 제일 쉬우냐고 묻는다면, 혹자는 의아해할지도 모르겠지만 35년 차 맏며느리라고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다. 친정어머니 기대가 커서 딸 노릇은 지금도 녹록하지는 않다. 시어머니는 온화하신 분이고 드라마를 쓰는 며느리가 좀 어려우셨는지 35년 동안 시집살이는커녕 싫은 말씀 한마디 하신 적이 없다.

가장 어려운 게 시어머니 노릇이다. 아직 초보라 어색한 탓도 있지만 혹시라도 시어머니 유세로 보일까봐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다. 나는 외아들을 두었다. 그러니 하나뿐인 며느리,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데 마음 상하게 할 이유가 없다. 내가 결혼했을 당시는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시대였고 바쁘다는 핑계가 있어서 국가정책에 충실하게 따랐다. 자식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아들·며느리를 대하는 기준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다.

아들은 7년 연애하고 결혼했다.


연애 초기, 명절 때 가족들에게 여자 친구 자랑을 했다. 손자의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신 뒤 시어머니는 전을 부치고 있는 내 옆으로 앉으시며 '니도 고마 아들 뺏기삣네' 하시는 게 아닌가. 억센 사투리에 깃든 어감에 동병상련이 뚝뚝 묻어났다. 그 긴 세월 동안 며느리 앞에서 장남에 대한 애정표현 한번 없이 덤덤하셨던 분이라 내심 충격이었다. 내가 시어머니께 깊은 연민을 갖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하늘같은 장남을 빼앗겼다 생각하면서도 내색 안하신 채 며느리에게 온화하실 수 있었던 시어머니 심정을 한번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시어머니는 드디어 아들을 뺏기게 된 나를 안쓰러워 하셨다.

나는 며느리에게 아들을 뺏긴 것이 아니라 보냈다고 생각하고 싶다. 잘 키워서 보낸 것이면 좋겠는데 그건 더 살아보고 며느리가 판단할 일이다. 나는 운 좋게도 온화하신 시부모님과 유순한 시동생, 시누이들 덕분에 시댁이 그다지 부담스럽지는 않았지만 맏이의 책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내 며느리는 시댁이 단출해서 책임에선 좀 자유로울 수 있으니 다행이다 싶다. 거기다 시댁은 자신을 늘 환대해 주는 곳으로, 언제든 찾아오는 발걸음이 가볍기를 바란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딸 노릇, 며느리 노릇을 해 보니 아무리 시어머니가 온화하고 다정해도 친정어머니 같이 만만할 수는 없고 시어머니도 내가 아무리 예뻐도 당신 따님처럼 만만하고 편하지는 않다는 걸 세월이 깨닫게 해 줬다. 어쩌면 시어머니는 장남을 빼앗긴 그 자리에 며느리를 곱게 모셔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며느리한테 베푼 온화함과 존중은 당신 아들을 위한 것일 것이다. 나도 아들의 자리에 며느리를 고이 모셔두기로 했다. 며느리가 행복해야 내 아들도 행복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최현경 드라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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