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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사람과 법 이야기] QR코드 단상

입력 2020.09.26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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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시대 '신분증' QR코드
車에 휴대폰 두고 내렸다가
전람회장 입장 못할 뻔

QR는 Quick Response의 약자
나의 신상정보·방문기록 담아
방역 자료로 쓰인다지만
이제 폰없이 외출힘든 사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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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한 전람회장을 찾았다가 적잖이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입구에서 감염병 방역을 위한 전자출입명부 제도 시행에 따라 QR코드를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신분증 제시 정도로 간단히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깜박 휴대전화를 차에 두고 나오는 바람에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도리 없이 꽤 떨어진 주차장에 다시 다녀오는 수고를 했다.

당혹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다들 곧잘 하는 듯 보이는데, 앱을 찾아 들어가 코드를 생성하기까지 스스로 하지 못하고 안내원에게 도움을 받는 어눌함을 보였다. 문명 기술의 속도에 뒤처진 채 공공장소에서 허름한 아재 행색을 보인 것 때문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신분 확인은 가장 기초적인 공적 사회생활에 속하는 영역이다. 그래서 신분증을 늘 몸에 지닌 지갑 속에 넣어둬야 하는 일은 지금까지 익숙해져 온 현명한 처신이었다.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데 신분증을 제시해 내가 누구인지 증명받고 뒤이어 사회생활의 안전과 평온함을 주고받아 왔다. 그러하기에 이런 정도의 법 제도적인 틀에 들어가 규율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빈털터리 지갑일지언정 신분증만은 늘 그 속에 담겨 있었고 그런 인연으로 이 아이는 나의 몸 한 부분으로 승화된 첫 물건이 됐다. 이제 이 아이는 한 걸음 더 앞서 나가며 커졌다. 나 스스로만으로는 내가 증명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이 만들어준 카드 쪼가리로만 여겼던 신분증이 나 대신 나를 증명해주는 든든한 후원자가 됐던 셈이다.

우리는 공기가 있어야 숨 쉬고 살 수 있음에도 그것의 존재를 당연한 듯 그다지 깨닫지 못하고 산다. 하지만 물속이나 대기권 밖의 외계를 잠시라도 떠올려 보면 아마도 바로 그 예외적 존재의 색다름을 느낄 수 있으리라. 지금껏 일상적으로 나를 증명하는 제도와 방식에 그다지 마음을 두지 못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QR코드 생성의 생경한 경험은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치부했던 일에 생각이 미치게 했던가 보다.

나 아닌 다른 물건이 나를 대신 증명해주는 세상. 과학기술의 숨 가쁜 진보가 내 생각의 완만함을 압도해 버린 이 시대의 엄정한 현실이 벌써 코앞에 다가온 느낌이다. 다만 전람회장 출입구에서 나의 휴대전화가 급하게 만들어준 QR코드의 의미가 그 순간에는 잘 와닿지 않았다. 그것을 만들어 제시하고 스캔에 응해야 전람회장에 들어갈 수 있다니 그냥 그 요청에 순응했을 뿐이었다. 그 코드 속에 뭘 담아준 것인지 그 당시로는 이해가 충분하지 못했다.

QR코드는 상형문자 집합 같기도 한 네모난 모양의 마크다. QR는 'Quick Response'의 약자다. 이 코드를 통해 빠른 응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바코드보다 꽤 많은 분량의 정보를 담을 수 있단다.


코로나19 확산 고위험시설로 분류된 다중이용시설에 방문한 사람의 신상과 방문 정보가 이 코드에 담겨 공공기관인 한국사회보장정보원으로 전송된다고 한다.

이제는 내 두뇌 시스템과 한 몸같이 연결돼 버려 손에서 떼려야 뗄 수 없게 된 또 다른 아이 휴대전화. 이 녀석은 매우 똑똑해서 내가 누구이고 취향은 어떠하며, 나아가 그간의 행적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나를 이 세상에 연결해 소통하는 강력한 도구가 됐다. 이제는 기특하게도 QR코드까지 만들어 나 대신 나를 증명해 세상을 출입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존재로 자라났다. 그뿐만 아니라 감염병 예방이라고 하는 사회안전망의 일익을 담당하는 역할까지 도맡게 됐다.

하지만 불안함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녀석이 얼마까지 커져서 공공기관에 내 행적을 일러바치는 것도 모자라 나를 괴롭히는 괴물로 돌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전람회장에서 뒤늦었으나마 실로 당혹스러웠던 것은 얘 없으면 이제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하는 세상이 오겠구나 하는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나의 방문을 온 세상에 다 노출한 채 말이다. 다가올 초연결사회 속에서 연결을 스스로 끊고 실존적 외로움을 몰래 즐겨도 되는 공간이 소중하게 생각되는 순간이다.

[김상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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