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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매경춘추] 표준과 선진국

입력 2020.10.19 00:06   수정 2020.10.19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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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 롯데호텔 에스컬레이터는 좌측통행인데 가끔 탈 때마다 생경하다. 익숙한 익스플로러를 크롬으로 바꾸어도 검색과 서비스 가입에 문제가 없다. 표준은 한 번 시장을 선점하면 기술이 고착돼서 바꾸려면 사회적 합의와 큰 비용이 수반(lock-in)된다. 그런데도 우측통행과 새 웹브라우저가 정착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디지털혁신 시대는 표준 활성화의 기회다. 모든 장치와 시스템이 연결되는 플랫폼 구현에 표준이 필수적이다. 기술 융·복합으로 인해 'R&D→특허→표준화'가 순서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진행된다. 오히려 표준을 먼저 만들기도 한다. 표준은 베끼면 되고, 물건을 제조하고 파는 것이 우선이라는 인식은 시대착오다. 선제적 표준화를 더 이상 방치하면 선도형 경제는 남의 나라 얘기다.


중국 정부와 산업계는 "삼류 기업은 제품을 만들고, 이류 기업은 기술을 개발하고, 일류 기업은 표준을 제정한다"는 슬로건 아래 '중국표준 2035'를 착착 실행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표준굴기'를 직접 주관하는 것이나, 민관 합동 표준화 투자 노력은 두려울 정도다. 예를 들어 항저우시 공무원이 상인회, 알리바바, 텐센트 등과 주기적으로 만나 전자상거래 표준 전략을 가다듬는다. 한·중·일 표준 관련 6개 당국은 '동북아 표준협력포럼'을 매년 개최하는데, 중국은 작년에 전년 대비 3배의 안건을 제안해서 삼국 간 밸런스를 맞추느라 힘들었다.

국제 표준화는 공적 표준화 기관인 ISO(국제표준화기구), IEC(세계전기기술위원회)와 사실상 표준화 기관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미국·영국·일본·독일·프랑스·중국이 ISO와 IEC 상임이사국인 점만 봐도 최강 선진국의 국제 표준화에 임하는 자세를 알 수 있다. 한국도 표준 강국이 될 수 있다. 제조업과 IT가 발달해 있고, 치열한 협상과 정치 과정인 표준 제정에서 한국은 주요 파트너로 자리매김했다.


필자는 2018년 말 부산에서 IEC 총회를 주관한 바 있는데, 참석한 2000명의 외국 표준 전문가들이 한국의 표준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중간자 역할을 당부했다. 정부와 민간도 국제 표준을 적극 선도하기 시작했다. 금년 6월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ISO 회장, 미국표준협회장, 세계병원연맹총재와 웨비나로 K방역 국제 표준화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고, PCR 기법·생활치료센터·드라이브 스루 표준안을 ISO와 추진 중이다. LS일렉트릭은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기화로 IEC에 공장 내 산업통신 표준을 제안하고 독일, 일본이 장악한 국내 시장을 뚫었다. 벤처기업 솔은 센서 기반 이미지 감지 표준을 IEC에 제안해 현미경 대체 시장에 진입장벽을 쳤다. 풍산은 한국 규격으로 인도네시아 탄약 표준을 만들어 연 4000만발을 수출한다.

표준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투자가 필요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젓자. 또다시 중국이 제안한 고려인삼 국제 표준 채택 등이 반복된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이상진 한국표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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