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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매경이코노미스트] 은행, 고객 알고 실물경제에 붙어라

입력 2021.02.2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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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페북 도전에 직면한 은행
취약점은 고객을 모른다는 것
은행-실물경제 간 소통매개인
어음할인을 요즘 은행은 무시
고객·실물 모르면 도태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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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업의 거대한 지각변동이 진행 중이다. 지금 아마존, 페이스북, 알리바바 등 굴지의 플랫폼 업체들이 은행업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조차 "앞으로 우리 경쟁상대는 구글과 페이스북이 될 것"이라며 긴장한다.

그러면 은행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고객을 알라"고 충고한다. 플랫폼 업체가 두려운 이유는 물류와 상류(trade)에서 누적된 빅데이터가 금류(banking)에서 큰 경쟁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금류도 물류와 상류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그것이 "고객을 알라"의 핵심 메시지다.

100년 전 금융후진국이었던 미국이 유럽을 쫓아갈 때도 "고객을 알라"는 것이 화두였다. 당시 미국 은행들은 고객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당시 대출 담당 직원들은 "밖이 안 보이는 간유리 아래에 조그맣게 뚫린 구멍으로 담보물만 쏙 잡아채어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담보에만 정신이 팔렸다는 말이다.

당시 가장 좋은 담보물은 주식이었다. 주식은 언제든지 팔 수 있으므로 가장 안전하고 건전하다고 믿은 것이다. 유럽 출신의 은행가 폴 워버그가 그런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그는 미국에서만 금융위기가 잦은 이유가 주식 담보 대출관행에 있다고 알렸다. 유럽의 은행업은 주식이 아니라 어음이 바탕을 이루고, 중앙은행도 어음할인을 통해 유동성을 조절한다는 힌트를 줬다. 그 깨우침에 따라 1914년 설립한 것이 미 연준이고, 지금도 연준법에는 '원활한 어음할인 수단의 제공'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어음은 생산과 구매활동의 부산물이므로 그것을 취급하다 보면 자연히 물류와 상류, 즉 고객과 실물경제를 알게 된다. 연준법의 기본정신은 어음 취급을 통해 "실물경제에 붙어라"다. 그런데 대공황을 지나 통화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연준이 변했다. 어음이 아닌 국채를 통화정책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럼으로써 실물경제와는 멀어졌다.


이제 어음할인은 명맥만 겨우 살아 있고, 실물경제는 경제 전망의 대상일 뿐이다.

오늘날 많은 중앙은행들은 실물경제에서 멀어진 지금의 연준을 좇아서 공개시장조작을 최고로 안다. '금융안정보고서'를 통해 다른 경제주체들에게 경고와 훈수를 날리는 것을 대단하게 여긴다. 통화정책을 금융활동이 아닌 연구나 교육활동쯤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본말전도(本末顚倒)다.

우리나라에서 "고객을 알라"는 원칙에 가장 충실한 금융기관은 신용카드사다. 카드사는 고객이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 확인한 뒤 신용을 제공한다. 전년도 회계장부와 담보만 보고 운전자금을 빌려주는 은행들의 대출관행과 딴판이다.

한국은행과 상업은행은 100년 전 미국의 걸음마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스마트폰 앱의 보급에 앞서 여신활동에서부터 고객을 철저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러려면 어음할인이 필요한데, 반론이 있다. 어음은 요즘 발행이 부진하고 연쇄부도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어음 발행 부진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한국은행조차 어음할인을 기피한다.


현재 30조원이 넘는 여신액 중에서 어음할인은 단 한 푼도 없다. 편하고 안전하다는 이유로 담보대출만 좋아한다. 어음이나 실물경제와 거리 두기가 미 연준보다도 더하다. 한은이 이러니 어음시장이 쇠퇴한 것은 당연하다.

연쇄부도는 오해다. 과거 금융 접근성이 낮았을 때는 어음이 은행에서 할인되지 못하여 상인들 사이에서 배서를 통해 흘러다녔다. 그래서 연쇄부도의 가능성이 높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신용카드 매출전표처럼 발행과 동시에 은행이 인수하므로 연쇄부도를 지적할 수 없다.

결론은 이것이다. 고객을 아는 것이 은행들의 생존술이고, 실물경제에 붙는 것이 한국은행의 생존술이다. 현재가 아닌, 100년 전의 미국이 교과서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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