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칼럼

[매경춘추] 스마트 콘트랙트 시대

입력 2021/04/08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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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산금융에서 금융 업무는 블록체인에 올려진 스마트 콘트랙트(계약)의 코드대로 처리된다. 코드가 알아서 돌아가니 직원이 필요 없고 상주할 직원 공간이 없어도 된다. 그러니 이론상 분산금융에서는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일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원칙대로 처리된다. 프로토콜에 정해진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코드가 실행되고 그 결과는 만천하에 다 공개된다. 따라서 모든 게 투명하다.

디지털 화폐의 핵심이 이 스마트 콘트랙트에 있다. 이 화폐는 놀랍게도 그 자체가 컴퓨터이기 때문에 프로그래밍 기능을 지녔다.


매달 정해진 날짜에 자동으로 월세가 나가도록 코딩할 수 있다. 구내식당, 구내약국 또는 구내서점에서만 결제되도록 부모가 코인에 코드를 담을 수 있다. 현명한 부모를 속여 자녀가 용돈을 받아도 술집에서 그 돈이 거절되게 하는 방법이 있다. 그래서 분산금융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코딩 능력이 부족한 고객은 금융 문맹 수준의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한다.

물가 안정과 고용 확대를 위해 중앙은행이 지폐를 찍어냈지만, 그 효과가 미미할 때가 많았다. 많은 현금이 유통되지 않고 장롱 밑에서 주무셨기 때문이다.

전통 금융에서는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분산금융에서는 마이너스 금리를 실현해 화폐의 유통 속도를 높일 수 있다.


한 달 이상 쓰이지 않는 화폐의 액면 가치를 1%씩 사라지게 한국은행이 코딩할 수 있다. 실비오 게젤(Silvio Gesell)이 제안한 감가(減價)화폐(demurrage currency)는 이렇게 구현된다.

자신이 담보로 맡긴 비트코인을 안전하게 돌려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면 코드를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 그렇지만 누구나 코드를 잘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법원 앞에 법무사가 있듯이 코드를 다루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 전문가들이 스마트 콘트랙트로 스마트폰 속의 지갑을 개인의 전용 은행으로 만들었다. 그 손안의 은행이 알아서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받고 이율이 높은 유동성 풀을 찾아 스스로 코인을 예치한다.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CBDC)가 나오면 시중은행의 명암이 갈릴 것이다.


고객은 손안의 은행인 지갑을 통해 CBDC를 바로 송금하고 최소 비용으로 최대 이익을 실현하는 코드를 돌려 자금의 관리부터 투자까지 모든 금융업무를 맡길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 은행의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렵다.

중앙은행조차 CBDC 발행 이후 시중은행의 역할 축소를 우려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업 대상의 장기자금 공급, 증권이나 채권 발행을 통한 유동성 확보, 신용장 개설 같은 보증 기능 수행으로 여전히 시중은행이 할 일이 많다.

그런데 인터넷은행이 출현하면서 시장 일부를 잠식한 것보다 '유니스왑'이나 '컴파운드' 같은 분산금융 기관이 정식으로 금융업 면허를 받으면 그로 인한 충격의 강도는 훨씬 더 클 것이다. 그 쇼크를 줄이고 경쟁력을 갖추려면 은행은 분산금융, 특히 코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마트 콘트랙트 시대의 주역에 금융 권력이 집중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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