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칼럼

[매경시평] 계몽된 능력주의를 위하여

입력 2021/05/10 00:05
코로나상황 극소수 재산급증
능력 따른 정당한 보상아냐
모두가 상호 의존하는 현실서
'내 능력으로 성공' 오만 대신
겸손에 기반한 능력주의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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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경제 시스템은 효율성과 공평성이라는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공산주의 시스템은 효율성을 무시했기에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자본주의 시스템은 효율성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어느 정도 공평성을 충족했기에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 두 가지 요건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기에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불린다. 그러나 지금은 지나치게 효율성을 강조하다 보니 공평성이 심각하게 훼손돼 자본주의 시스템의 위기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해야 하는 실정이다.

주류 경제이론에 의하면 완전 경쟁과 완전 정보의 가정하에서 시장경제는 다양한 인적·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뿐만 아니라 공평한 분배를 달성하므로 분배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 경쟁과 완전 정보하에서 각자 생산과정에 기여한 정도는 각자의 한계생산성에 의해 측정되며 이에 합당한 보수가 지불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이것은 원칙적으로는 맞지만 치명적인 두 가지 결함으로 인해 현실의 분배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첫째, 현실은 불완전 경쟁과 불완전 정보가 지배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계생산성이 분배의 적절한 기준으로 역할을 할 수 없다. 둘째, 현실적으로 한계생산성을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한계생산성에 의해 보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보수가 한계생산성을 결정한다는 인과관계의 역전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분배를 정당화하는 그럴듯한 이야기, 즉 내러티브로서 능력주의(meritocracy)가 사람들에게 파고들었다. 이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재산이 아니라 재능이나 노력 및 업적에 의해 개인에게 소득이 귀속돼야 한다는 원칙으로서 한계생산성이론의 현실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능력주의가 이런 원칙에 충실하지 않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예컨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실적이 좋아졌다고 최고경영자에게 천문학적인 보수가 주어진다면 이는 능력주의 원칙에 따른 결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나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를 비롯한 일부 인사들의 재산이 천문학적으로 증가한 것은 능력주의에 따른 정당한 보상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미국 하버드대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최근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능력주의로 인해 자신의 무능과 굴욕감을 느꼈던 빈곤층과 저학력자들의 반발 때문이었다고 진단했다. 샌델은 그 밖에 대학입시제도를 비롯해 우리가 참고할 만한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들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도 능력주의가 팽배해 있다. 그 결과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오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실패한 사람은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굴욕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능력주의를 폐기하고 과거처럼 세습제 또는 공산주의식 강제 배분 시스템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주의가 정착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만약 자기가 인도에 태어났다면 하루하루 연명하는 처지가 되었을지 모른다면서 미국이라는 시장이 있었기에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겸손을 드러낸 것이다. 모두가 모두에게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했다는 오만 대신 겸손을 바탕으로 하는 능력주의는 계몽된 능력주의(enlightened meritocracy)라 할 수 있다. 어려운 시대에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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