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칼럼

[매경춘추] Delete

입력 2021/10/2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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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베란다 한쪽에는 상자 하나가 밀봉된 채 방치돼 있다. 1997년 첫 해외 근무를 준비하며 꾸렸던 국제 이삿짐 박스다. 연애 시절 앳된 모습부터 아이들 커가는 장면까지 소중한 추억이 가득한 앨범을 정성스럽게 포장했던 기억이 스친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앨범을 25년 동안이나 열어보지 않았다니 스스로도 너무나 무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굳이 앨범을 꺼낼 필요도 없다. 휴대폰에서 언제든지 사진을 볼 수 있고 시스템이 알아서 감성 돋는 동영상도 만들어준다. 일상을 찍은 사진 속 얼굴들은 대부분 밝은 표정이어서 주로 자연스럽게 기쁘고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과연 좋은 일만 있었을까. 분명 잊고 싶은 흑역사도 있을 텐데 사진 속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보통은 현실이 힘겨울 때 과거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향수에 젖는다.


무려 969세까지 살면서 예전의 좋은 기억만 떠올리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했다는 '므두셀라'처럼 현실을 외면하고 과거에 갇혀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인생일까?

우연한 기회에 제목을 줄여 '검블유'로 불리는 드라마를 접했다. 빅테크 사이의 피 말리는 경쟁과 혁신, 그 속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열정에 동화돼 정주행했다. 과감한 개편을 앞둔 직원에게 건넨 대표의 조언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시대가 결국 버리게 될 것을 미리 버립시다." 직원 또한 청춘을 바쳐 키워낸 서비스의 'Delete'를 결정하며 멋진 대사를 내뱉는다. "그 서비스는 빛났던 과거이자 잊힌 영광일 뿐입니다. 나는 내 영광의 현재이고 싶지 과거이고 싶지 않아요."

우리 집에는 앨범 박스뿐만 아니라 곳곳에 오래된 물건이 많다. 이사 때마다 싸들고 다녔던 수많은 과거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는 느낌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최근 정리 원칙을 정했다.


2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과 6개월 이내 보지 않은 자료는 정리한다. 미니멀 라이프 열풍이 어쩌다 분 게 아니고, 정리수납전문가 자격증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비워내다 보니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끔해진 공간만큼이나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피터 드러커는 "누구나 4~5년마다 새로운 지식을 조달해야 한다. 조직은 기존 구조, 관습 등 친숙한 것을 체계적으로 폐기하는 것을 전제로 조직돼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동시에 기존의 지식과 관습을 정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회사에서 기획안을 가져오는 직원들에게 31가지 아이스크림에 빗대어 새로운 제도나 서비스를 만들려면 그 수만큼 정리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최근 직원들과 진행하고 있는 캠페인 문구처럼 'Delete'해야 비로소 'Reload'할 것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회사 로비에 놓인 외투 기부함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이번주 말에는 옷장 속에 잠자고 있는 외투를 정리해야겠다. 나의 비움으로 누군가의 빈 공간을 따뜻하게 채울 수 있도록.

[진옥동 신한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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