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칼럼

[매경춘추] 국밥과 찻물

입력 2022/01/25 00:04
수정 2022/01/2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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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이 둘러서서 편집장 미란다의 결정을 기다리는데, 긴장감이 팽팽하게 날이 섰다. 신입사원 앤디는 이 경직된 장면이 못내 낯설다. 벨트 하나 고르는 데 이렇게 심각할 일인가 말이다. 그만 코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옮겨졌고, 미란다는 낮은 목소리로 패션산업의 노력을 읊어 일격을 가한다. 미란다의 말은 앤디의 폐부에 적중해 교훈으로 녹아내렸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이 장면이 그간의 고정관념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했었다. 현대예술은 영역을 제한하지 않음을 실감한 거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상업미술 영역에서 시작해 대가가 되었다. 레이 가와쿠보, 알렉산더 매퀸, 애니 리버비츠의 작업을 '상품'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이들 작가는 전위적으로 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런 변화와 함께 관람객은 다양한 곳에서 다채로운 예술을 즐긴다.

관람객은 다양한 경험으로 미감에 점점 더 자신감을 쌓는다. 그래서 감상 직후 즉각적으로 호불호를 가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는 자칫 오판이 생길 수 있다. '고전' '타문화' '전통' 등의 예술을 대할 때 문제가 드러난다. '재미없다'고 판단된다면 즉각, 결별을 선언하고 마는 것이다.

언젠가 끔찍한 공연 평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고서를 무대에 재현한 공연이었는데, 무용에 식견이 조금 있던 지인이 '춤으로 고문한다'고 비평하며 돌아서더라는 거다. 그 공연은 전문인에게서 품격이 높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었다. 조금만 들어가면 그 아름다움을 풀 열쇠를 발견했으련만, 안타까웠던 기억이다. 전통의 관객 유치와 연관해 가장 많이 듣는 권유는 '대중' '쉬움' '세계화'를 향하라는 거다. 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시도된 여러 노력 중 아직 이렇다 할 답이 없는 걸 보면 말이다. 스승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키라 가르치셨건만, 이런 요구 앞에 설 때면 난감하다. 무한한 영감을 제공하는 '전통'은 당대 예술로 빛나던 것이었다. 그것이 오늘날 전통으로 남아 '지금'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한다. 이 둘, 전통과 현대예술은 분명 모양과 역할이 다르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빛을 발해 문화를 꾸린다. 이들이 각기 품어내는 특유의 아우라를 제대로 감상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여기 분별(分別)이 있다. 분별은 갈라짐을 위한 나눔이 아니다. 헤아리고 인정하는 여유다. 서로를 봐주는 눈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별에 가장 가까이 쓸 말은 이해가 아닌가 싶다. 너와 나, 세대와 세대, 분열 없는 화합을 모색한다. 예술로 세상을 넘겨보니 '함께'가 오롯하다. 국밥은 뜨거워야 맛이지만, 찻물이 너무 뜨거우면 떫더라.

[박성호 무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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