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칼럼

[세상사는 이야기] 길 앞에서 겸손해지자

입력 2022/08/06 00:04
집이 개인의 공간이라면
길은 남과 함께하는 공간
인간 외에 온갖 생명체가 공유
자기가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을 좇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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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이 길을 가르쳐주진 않는다./길은,/가면 뒤에 있다." 황지우 시집 '나는 너다'(1987)에 수록된 시 '503.'의 한 대목이다. 경(經)이 옛 성현의 가르침을 담고 있으므로 경을 통해 길을 갈 수도 있겠지만, 시인은 이미 만들어진 길을 가기보다는 실천적으로 길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약초나 버섯이나 고사리를 채취하기 위해 산을 헤매본 사람들은 이 구절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길보다는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 약초나 버섯이나 고사리가 많게 마련이어서, 그것들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없는 길도 과감히 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 현대인이 개인적으로 길을 만들면서 가는 일은 드물다. 때로는 이미 만들어진 길도 잘 몰라서 헤맨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광주 친척집에 갔던 나는 골목길을 빠져나가 이리저리 다니다가 돌아가자니 집을 찾을 수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되돌아가려고 움직일수록 길은 점점 낯설어졌다. 파출소에 가서 길을 물어본 후에야 집을 찾았다. 인도 바라나시의 게스트하우스에 묵을 때도 그랬다. 이 골목 저 골목 구경한답시고 다니다 보면 숙소로 가는 길이 오리무중이었다. 그때는 어김없이 꼬마 아이가 나타났고, 5루피만 주면 아이는 가볍게 길을 찾아주었다.

원시 문명 시절, 길은 참으로 소박한 공간이었다. 동굴 같은 집을 나서면 세상이 온통 길이었다. 길이 아닐지라도 한 사람이 가고 다른 사람이 가고 또 다른 사람도 가면, 그곳은 자연스레 길이 되었다. 그야말로 "길은, 가면 뒤에" 있었던 것이다.

길은 집의 상대어다. 우리말의 길과 집은 발음상으로도 대조적이다. 집을 발음하면 입이 닫히는 반면, 길을 발음하면 입이 열린 채로 끝난다. 집은 문을 닫으면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한 쉼터가 되고, 집을 나서는 순간 밟게 되는 길은 세상을 향한 소통의 공간이다.

길의 발달사는 문명의 발달사와 다름없다.


오솔길밖에 없던 원시시대를 지나 물길이나 바닷길이 열렸고,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생기고,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 기차가 다닐 수 있는 길, 하늘길, 우주로 가는 길까지 열렸다. 지상에만 있었던 길이 지하로도 뚫리고 물속으로도 뚫렸다. 지상의 길조차 고가도로를 통해 다양하게 분화되어 그야말로 복잡다단해졌다.

길이 복잡해진 만큼 인간은 편리해졌다. 옛날에는 서울에서 동해안을 가려면 험준한 태백산맥을 넘어야 했다. 대관령이나 한계령, 미시령은 태백산맥을 넘는 중요한 고개였다. 그러나 지금은 터널을 뚫어서 만든 고속도로 덕분에 짧은 시간에 동해안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은 길을 통해 문명을 더욱 고도로 발전시켰다. 그럴수록 우리는 길에 겸손해야 한다. 우리 삶이 길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길의 교통 상황이 어떠냐에 따라 일의 성패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집이 개인의 공간이라면 길은 공유의 공간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공간이다. 땅을 뚫고 산을 뚫고 길을 내면 얼마나 많은 생명체가 희생되어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 생명체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아무런 보상도 없이 졸지에 철거민이 되거나 이재민이 되어 급기야 목숨까지 바치는 셈이다.

신경림의 '길'이라는 시는 길을 만들고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이어야 하는지 잘 말해준다. 시인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고 경고한다. 이제 우리는 모든 길이 밖으로 열렸다가 다시 안으로 향하는 의미를 성찰하면서 "길은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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