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칼럼

[매경시평] 지연되는 정의

입력 2022/08/08 00:04
판사 업무량 전보다 줄고
사건처리는 느려졌는데
판결 수준 염려는 더 커져
'좋은 재판' 약속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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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소송 절차가 공정하고 신속하며 경제적으로 진행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민사소송법 제1조의 규정이다. 우리 법원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사건을 빨리 처리해 왔다. 전관예우 등 시비가 있었지만, 재판도 공정하게 잘한다고 평가받아 왔다. 세계은행은 해마다 세계 각국의 기업 환경을 평가하는데, 민사재판 분야에서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로 평가받았다.

세계 최고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판사들의 희생이 적지 않았다. 많은 판사가 휴일 없이 업무에 몰입했고, 과로로 순직한 판사도 있었다. 판사들이 고생한 만큼 존경도 받았다. 판사로 재직할 때는 집에서도 사건 기록과 자료를 검토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만큼 자녀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적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늘 무언가를 읽는 아버지를 따라 책 읽는 습관을 길렀다.


독서하는 아이에게 공부한다고 칭찬해 주면, 아니 일하고 있다고 대답해서 웃음도 주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보람이 컸다.

최근 판사들의 업무 환경이 좋아졌다. 먼지 나고 무거웠던 종이 기록이 사라졌다. 판례와 논문도 도서관에 갈 필요 없이 컴퓨터로 순식간에 간단히 찾아볼 수 있다. 손으로 쓰다가 고치려면 다시 써야 했던 판결문도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손쉽게 작성할 수 있다. 타자가 힘들면 말로 해도 컴퓨터가 알아서 문서로 변환해 준다. 업무 효율과 생산성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예전과 같이 희생하지 않아도 충분히 그만큼 일을 처리하고 저녁 있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대법원은 좋은 재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법원의 사건 처리가 점점 느려지고 있다. 민사 합의사건 소장을 제출하면 첫 재판기일이 지정될 때까지 2017년에는 117일이 걸렸다. 그런데 작년에는 150일이 걸렸다. 재판이 늦게 시작되니 판결도 늦게 나올 수밖에 없다. 2017년 민사 합의사건 1심 평균 처리기간이 293일이었는데, 금년 상반기에 386일로 늘어났다. 민사 항소심 평균 처리기간도 2017년 230일에서 올해 상반기 323일로 증가했다.


미국 법조인협회의 민사사건 처리 권고기준은 90%의 사건을 1년 안에, 100%의 사건을 2년 안에 처리하는 것이다. 미국 법원은 이 기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선진국 중 사건 처리가 늦기로 악명 높은 미국 법원이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법원은 거꾸로 가고 있다. 사건 처리 속도에 있어서는 미국을 따라가면 안 되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법원의 사건 처리가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있지만, 판사들이 예전보다 일을 적게 하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보통 업무 처리의 양과 질은 반비례한다. 일을 적게 처리하면 그 결과가 좋아져야 한다. 그런데 법원의 판결이 예전보다 공정해지고 수준 높아졌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사건 당사자들이 판사의 정치 성향과 자질에 대해 염려하고 대책을 묻는 일이 많아졌다. 사건 처리가 늦어지고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커가는데 법원은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우리는 법학전문대학원과 법조일원화 등 미국식 제도를 도입했다. 좋든 싫든 미국의 사법제도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1심 재판은 원칙적으로 단독 재판으로 바꾸어야 한다. 지방법원 항소부와 고등법원을 통합하여 심급제도를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영미식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하여 당사자가 직접 증거를 수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법관들이 승진을 기대하지 않고 판사로 만족할 수 있도록 조직문화를 개선해야 한다. 당사자가 판사의 성향이나 자질에 신경 쓸 필요가 없도록 해 주어야 한다. 상고제도 개선만 논의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이다.

[강일원 변호사·전 헌법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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