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칼럼

[매경춘추] 피임, 생명을 구한다

입력 2022/09/2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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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무고한 시민들이 폐허 속에 갈 곳을 잃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파괴만이 전쟁은 아니다. 아직도 많은 국가에서 기본적인 건강 권리가 보장되지 못해 또 다른 모습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몇 년간 지속된 국가부도 사태로 베네수엘라의 피임약과 콘돔 가격은 비현실적으로 폭등했다. 피임 수단에 대한 접근성 저하로 계획하지 않은 임신이 늘어나며, 결국 많은 여성이 불법 임신 중지 시술을 선택했다.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시술은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하고, 심하면 사망에도 이르는 상황이 지금도 벌어진다.

여성 건강에 집중하는 회사에 다니며 깨달은 점은 피임약이 '생명을 구하는 약'이란 것이다.


위의 예와 같이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 여성은 임신 중지 시술로 건강을 위협받거나 출산하더라도 양육에 대한 충분한 준비가 이뤄지지 않아 경제적·정서적으로 막대한 부담을 안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사회문제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여성들 역시 계획하지 않은 임신에 대한 지식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이용하는 상황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 15~49세 한국 여성 8500명을 대상으로 한 2021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인공 임신 중지 경험 여성은 약 600명으로, 이들 중 어떠한 피임도 하지 않은 경우가 46.2%였다. 그 이유로는 '임신이 쉽게 될 것 같지 않아서'라는 응답이 절반을 차지했다. 작년 필자의 회사가 성인 여성 약 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임신에 대한 불안감이 높다는 답변에도 불구하고 피임법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간편함'을 가장 많이 선택한 모순적인 결과가 나왔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 즉 피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첫걸음은 교육일 것이다.


2019년 조사에 따르면 중학생 10명 중 3명은 학교에서 진행되는 성교육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답했다. 청소년은 물론 우리 모두가 균형 잡힌 성 건강 교육으로 다양한 피임 옵션을 인지하고, 책임과 성 주체성까지 아우르는 양질의 교육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사회적 인식의 변화 역시 필요하다. 청소년의 개방적인 성 문화를 소재로 한 방송이 생겨나는 등 분위기 자체는 과거에 비해 달라졌지만, 다양한 피임 수단이나 사용 방법 등에 대해 편하게 논의하고 편견 없이 대화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한 번 더 돌아봐야 한다. 또한 자기 자신 역시 본인의 건강 상태와 선호도에 맞는 피임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정보를 구하고, 알고, 스스로 건강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바라보는 사회적 관심은 과거보다 나아지고 있다. 아직 부족한 점들을 지렛대로 삼아 변화를 위한 노력과 실천을 계속한다면 계획된 임신과 출산을 통한 여성의 건강, 나아가 우리 가족과 사회의 건강이라는 아름다운 결말은 분명히 만들어질 수 있다.

[김소은 한국오가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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