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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드레스는 드라마에만 있는 게 아니야.

입력 2020.06.04 1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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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의 미니멀라이프 도전기-38] 올해 네 살이 된 첫째는 드레스 마니아가 되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 네 살들은 하나같이 드레스를 입을까? 정말 미스터리다. 매일 아침마다 공주 드레스를 입겠다는 딸아이와 씨름하느라 어린이집 등원시간이 늦어지기 일쑤다. 어느 날부턴가 네 살 공주님은 자기 옷뿐만 아니라 내 옷까지 간섭하기 시작했다. "엄마 오늘은 이 드레스 입어." 아, 그녀가 골라준 옷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원피스였다. 여름 휴양지에 놀러갈 때 입고 싶어 준비해 둔 옷이었는데, 내 옷장을 뒤지다 딸아이가 발견하고는 나에게도 본인의 공주 취향을 전염시키려든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나는 그날 화려한 색감의 휴양지 드레스(!)를 입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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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그런데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여신핏 원피스'라는 이름에 낚여 온라인으로 주문한 원피스였는데, 늘 입던 헐렁한 티셔츠와 바지만 입고 갔을 때보다 왠지 어깨가 펴졌다. 등원길에 만난 다른 아이 엄마들도 '오늘 좋은 곳 가시냐' '오늘 너무 예쁜 것 아니냐'며 인사를 건넸다. 색감은 화려하지만 편안한 소재였던지라 내친김에 산책도 다녀왔다.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인데 공기가 달라진 기분이었다.

'계속 이 옷을 입어 달라'는 공주님의 주문에 그날 나는 집에서도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드라마에 나오는 '사모님'들이 집 안에서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모습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충분히 입을 만했다.

퇴근한 남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늘 이 옷 어때? 애가 옷을 못 갈아입게 해서 계속 입고 있었어."(나) "괜찮네. 원래 입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낫네?"(남편) "원래 입던 게 그렇게 별로였어?"(나) "음, 뭐 괜찮지는 않았어. 나도 안 입는 옷이잖아."(남편)

이쯤에서 원래 내가 집에서 상시 입고 있는 옷을 소개하자면, 6년 전 결혼하면서 구입했던 체크색 커플 잠옷바지에 역시 남편과 커플로 구입한 단가라 셔티츠다. 체크 잠옷바지는 같은 바지가 두 벌이지만 남편이 하루 입고 입지 않아 내가 번갈아가면서 6년째 4계절 입고있다. 연애 시절 구입했던 티셔츠를 남편은 몇 번 입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처분했고 나 역시 어울리지 않아 차마 밖에 입고 나가지 않다가 집에서 입고 있었다. 결국 남편이 별로라며 버린(!) 옷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도저히 밖에 못 나가고 있던 옷의 조합을 하루에 가장 긴 시간 동안 입고 있었던 셈이다. 이들이 세탁기에 들어가 있을 때는 그들 못지않게 나가서 입기엔 무척이나 별로인 옷들을 아무것이나 '주워입고' 살아왔다. 딱히 묘사할 필요도 못 느끼는, 그저 그런 옷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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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한 여배우가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예쁜 엄마를 둔 자녀들이 참 부럽다는 진행자의 말에 그녀는 웃으며 자기 아이들이 드라마에 나오는 자기 모습을 못 알아보거나 영 어색해한다고 답했다. 집에서 늘 입는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무릎 나온 바지, 맨얼굴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와 비슷한 여배우의 털털한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더랬다. '내가 저 외모라면 집에서도 조금 더 예쁘게 꾸미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그럼 이 말을 뒤집어보자. 집에서 대충 입고 있는 나는 못난이란 말인가?

'미니멀 육아의 행복'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요가 바지에서 제발 벗어나라'고 조언했다. 일을 하러 나가지 않거나 특별히 차려입을 일이 없는 날이면 편안한 요가 바지를 입고 싶은, 그리고 그걸 입은 채로 48시간 동안 뭉개고싶은 강한 유혹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런 유혹이 들 때마다 나를 돌보는 10분을 사용하라는 게 저자들의 팁이다. 그 10분 동안 말쑥한 스커트나 바지를 입고, 그에 어울리는 예쁜 상의를 매치해서 입어보고 목걸이를 하나 해보면 어떨까? 요가 바지를 입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 들 것이라고 책은 말한다. 책을 읽을 때는 대충 넘겼는데, 반강제로 홈드레스(비치 원피스에서 탈바꿈한)를 입고 나니 참 공감이 되는 대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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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의류 브랜드에서 집에서 입는 옷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어떤 옷을 집에서 입고 지내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사람들은 '유행이 지난 옷, 못 입게 된 옷'을 입는다고 답했다. 무조건 편한 옷·헐렁한 옷, 안 입어서 버려진 식구들 옷, 사은품이나 단체복 판촉물로 받은 옷 등이 다음 순위였다. 응답자들은 스트레스 없는 편한 옷이 최고라서, 가족들한테까지 잘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혹은 버리기는 아까워서 그냥 '아무거나 입는다'고 했다. 하지만 택배 아저씨를 비롯한 예고 없는 방문객들이 들이닥쳤을 때 민망하고, 식구들이 옷차림을 타박할 때는 부끄럽고 "친구 엄마는 예쁜 옷 입는데"라는 아이의 말에 왠지 서운한 기분이 들기도 한단다.

홈웨어와 라운지웨어의 매출을 늘리기 위한 홍보 자료였지만 사실 모든 이야기가 내 이야기여서 씁쓸했다.

가장 사랑하는(했던?!) 사람에게 굳이 잘 보일 필요가 없다며 대충 '버리기 아까운 옷'을 입었던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후줄근함'이 '편함'의 동의어는 아닌데 굳이 버려도 무방한 옷을 입고 많은 나날들을 지냈던 나 스스로에게 미안하다. 나의 공주마마가 매일 아침 지정해준 멋진 홈 드레스 덕분에 드디어 후줄근함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엄마 이 옷 정말 예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딸 덕분에 조금 더 우아한 하루를 보내게 됐다. 그리고 버리기 아깝다고 6년을 끌어안고 지내던 '그저 그런' 옷들은 시원하게 비워낼 수 있었다. 고맙다 딸아!

[이새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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