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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름날 내게 일어난 기적

입력 2020.07.17 1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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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아포리즘-83]

#196

장이머우 감독이 만들고 장쯔이가 주연한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의 남자 주인공처럼 살고 싶었다.

앉아서 천리를 볼 만큼 지식과 명석함이 있지만 직업은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인 남자. 그 명석함 때문에 세상은 그를 주시하고 질투하지만 세속의 눈초리를 뒤로한 채 벽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남자. 낭랑한 목소리로 매일매일 책을 읽어주는 남자.

그리고 그곳에서 순백의 영혼을 가진 한 여인을 만나는 남자. 돈도 배움도 없지만 지적 아름다움을 볼 줄 알고, 인정하고, 지켜줄 수 있는 여자. 그런 시골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책 읽는 소리가 노래보다 달콤하고 우아하다고 느끼는 여자. 그 목소리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지는 여자. 한 번도 그 목소리를 배신하지 않고 평생을 기다린 여자. 그리고 그 목소리를 가장 나중까지 들은 여자. 그리고 그 목소리를 수습해 마지막 길을 보낸 여자.

#197

우연히 작은 텃밭을 일구게 됐다.

그날부터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됐다. 토마토 열매가, 완두콩 새순이, 막 줄기를 감기 시작한 오이가, 마른땅을 굳세게 뚫고 싹을 낸 옥수수가, 거짓말처럼 땅속에 알을 맺기 시작한 감자가 나를 필요로 하는 날들이 시작됐다.

직장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밖에 텃밭에 갈 수 없는 나는 밤마다 꿈을 꾸었다.

감자알들이, 토마토가, 완두콩이 나오는 꿈이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새벽 일찍 잠이 깼다. 아파트 창밖을 바라보며 강변에 일궈놓은 텃밭을 상상했다.

그렇다. 나는 땅에 속한 사람이었다. 풀을 뽑고, 줄기를 묶어주고, 벌레를 잡고, 물을 주면서 나는 내가 땅에 속한 생명체였음을 깨달았다.

토마토도, 옥수수도, 완두콩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가르치듯 그날그날의 아픔과 환희를 주었다. 어떤 날은 부러진 줄기와 벌레 먹은 잎으로, 어떤 날은 이제 막 수줍게 얼굴을 내민 작고 눈부신 열매로 나를 가르쳤다.

무엇인가가 싹을 내고, 자라고, 열매 맺고, 죽어가는 것을 파노라마처럼 본다는 것. 그것은 치명적이고 행복한 일이었다. 그 옆에 내가 있었다는 것. 그 작은 것들에 내가 고개를 숙였다는 것. 그들 때문에 환희로웠고, 그들 때문에 아팠다는 것.

이 여름날 내게 일어난 기적이었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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