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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고 평등하게 인생의 마지막 길을 간 단독자 박이문에게 경의를 표한다.

입력 2020.09.21 1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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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아포리즘 84]

#198

커피 마시러 야외 카페에 왔는데 이름 모를 줄기 하나가 오롯이 담장을 넘어와 있었다.

갑자기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허무주의자가 더 열심히 살게 되어 있어. 궁극적인 목표라는 걸 무의미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매 상황 최선을 다하는 거지. 절대적 해답은 어차피 없다고 생각하니까. 부질없는 '숲'을 논하기보다 '풀' 한 포기 한 포기에 집중하는 거지."

의식이 온전치 않은 상태로 요양병원에 왔을 때도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직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는 철학자 박이문이 한 말이다. 나는 담장을 넘어온 고독하면서도 당당한 줄기를 보며, 단독자로 살다가 책 속에 파묻혀 마지막 길을 간 박이문이 생각났다.

집에 돌아와 내 방에 꽂혀 있는 그의 책들을 올려다봤다. '철학의 흔적들' '나비의 꿈이 세계를 만든다' '시와 과학' …. 내게는 하나같이 고고하고 소중했던 한 시절의 위로였다.

선생은 한국 사회에서는 드문 유형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우리가 입만 열면 '세계화'라는 말을 떠들기 훨씬 이전에 이미 세계화된 인물이었고, 진정한 의미의 허무주의자였으며, 파벌을 가진 적 없는 단독자였으며, 한눈팔지 않고 연구와 창작에만 매달린 예술지상주의자였다.

1930년생인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어른이 된 불행한 세대였다.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시대를 살아서일까. 순간순간 불타오르는 그의 학문적 욕구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1950년대 말부터 실존주의에 관한 글로 학계의 눈길을 끌었던 그는 교수직을 때려치우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소르본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지적 영역을 확장하고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했고 미국 독일 일본 등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 귀국한다.

그는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했지만 맹목적으로 서구를 추종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배타적인 민족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자유로웠다. 그는 누구도 억압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지배당하지 않았다.

"인간은 누구나 길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숱한 길들을 걸으며 우연과 운명의 무늬를 삶 속에 새길 뿐이다."

선생은 말년에 한국 학계에 대해 가끔 쓴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학자들의 저서보다 연구소가 더 많고, 학문적 연구보다 행사와 학회가 더 많고, 학회마저 탐구의 장이 아니라 사교장이 되어 가고 있다."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결혼을 55세에 했을 정도로 현실에는 무능했다. 셈에 어둡고 정치에 무력했지만 그는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기 이론을 가진 미학자였다.

낮고 평등하게 책을 싸들고 인생의 마지막 길을 간 단독자 박이문에게 경의를 표한다.

#199

트로츠키라는 인물에 이유 없이 연민이 생긴다. 최근에 본 드라마 '트로츠키'에는 트로츠키가 빈에서 프로이트의 강연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둘은 강연이 끝나고 계단에서 약간의 논쟁을 하는데 그때 트로츠키가 프로이트에게 한 말이 압권이다.

"당신은 나약함과 싸우지만, 나는 강함과 싸웁니다."

정신병리학자였던 프로이트는 인간의 숨겨진 병적 무의식을 파헤쳤고, 트로츠키는 인간의 욕망과 권력 의지를 링 위에 올려 놓고 대결한 사람이었다. 다른 길을 걸었지만 둘은 세상을 바꿨다.

그 시대 빈을 살아낸 모든 이에게 경의를…. <매일경제 문화선임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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