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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는 자꾸만 뭔가를 고백하게 된다.

입력 2020.10.20 15:01:00 수정 2020.10.23 09: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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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아포리즘-85] #200

얼마전 글 쓰는 친구와 당일치기 기차여행을 했다. 지역에서 열리는 백일장 심사를 하기 위해 간 것인데, 우리는 그동안 못 나누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털어놓았다.

알고 지낸 지 수십 년이 됐지만 차마 못했던 이야기를 그날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았다.

서로에게 섭섭했던 이야기, 창피해서 못했던 이야기, 고민스러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실타래 풀어놓듯 끄집어 낼 수 있었다. 그날따라 왜 그랬을까. 아무래도 그건 기차의 힘이다.

기차를 함께 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나란히 앉게 된다. 사실 낯선 경험이다. 사람을 단 둘이 만나면 당연히 마주보고 앉게 되지 나란히 앉을 일은 별로 없다. 그렇다보니 한 사람이 창밖을 보면 한 사람은 실내를 보게 된다. 결국 같은 걸 보지 못하는 셈이다. 하지만 기차는 나란히 같은 방향을 보고 앉게 된다.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이 흔들리는 경험은 서로를 친밀하게 만들어준다. 서로 눈을 보고 있지 않으니 덜 민망해서 고백하기도 편하다.

그날 친구와 나는 왕복 6시간 정도 기차를 함께 타면서 긴 고백의 시간을 가졌다. 때로는 무릎을 치기도 했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고, 함께 분노하기도 했다.

서울역에 내려 헤어질 때 한 사람을 제대로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기차는 고백이다.

#201

내게 기차를 탄다는 건 아주 매력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서울 출생이라 기차를 타본 적이 많지 않다보니 기차에 관한 기억엔 늘 사연이 따라 다닌다.

대학시절 수배 중이던 친구와 함께 했던 여행, 군입대 날 탔던 입영열차, 지역에 사는 여자친구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던 밤 열차. 이런 것들이다.

여기에 해외여행을 시작하면서 경험한 외국 기차여행도 특별했다. 동구가 붕괴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감행한 체코 기차여행, 고비사막을 횡단했던 실크로드 기차여행, 달력에나 나올 것 같은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던 알프스 산악열차, '카시오페이아'라는 이름에 이끌려 탔던 일본열도 종단 침대열차.

기차는 늘 그랬다. 한 컷의 추억이자 사연이었다.

#202

가끔 밤기차가 지나가는 걸 물끄러미 쳐다볼 때가 있다.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밤열차는 흡사 진공관 같은 하늘을 가르고 지나가는 우주선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 마리 사연 많은 짐승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 열차에는 사연이 있다.

캄캄한 세상을 가르는 밤기차의 불 켜진 창은 하나 하나가 스크린이다.

스크린 안에는 때로는 가슴 아픈 사연이 때로는 기쁜 사연이 들어 있다. 승리한 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실패한 사람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움의 드라마가 펼쳐지기도 하고, 미움의 드라마가 펼쳐지기도 한다.

밤기차의 불 켜진 창은 생의 스크린이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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