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프리미엄

뉴욕 구겐하임을 겨냥하는 K아트 선두주자 김강용(上)

입력 2020/12/29 06:01
[요요 미술기행-66] 지난 18일 양평 가는 경의선 기차 양편은 이번 겨울 들어 처음 제대로 온 눈으로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강하면 항금리 스튜디오 마당에도 눈이 내렸다. 성곡미술관에서 대형 회고전을 마친 지 석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작업실에는 신작이 보였다. 코로나로 외부인과의 접촉이 줄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다고 했다.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미국 뉴욕행의 배경과 현지에서의 활동이었다. 자신은 분명 출발이 화가였는데 모교인 홍익대 대학원 교수, 교육자가 되어 있었다. 제자들의 논문에 빨간 줄을 치고, 강의 외에 행정 업무를 집에서도 해야 했다. 힘들어도 원 없이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직접 만든 화판을 가지고 미국행을 감행했다.

작업실에서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김강용 작가/사진=이승은


그는 2005년 맨해튼 브리지와 브루클린 브리지 사이의 브루클린 지역인 덤보의 한 오피스텔에 작업실을 차렸다. 덤보는 갤러리와 작가 스튜디오가 운집해 있다. 또한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의 촬영 무대이기도 하다. 한국 후원자가 공간을 제공했다. 2년 가까이 작업에만 몰두해 작품이 제법 쌓였을 때쯤 미술평론를 하는 프랫인스티튜트 교수를 소개받았다. 그가 첼시 일대 10여 군데 갤러리를 보여준 뒤 전시하고 싶은 한 군데를 정하라고 했다. 김강용은 한 단계 위 갤러리를 원했다. 2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소더비 경매에 내놓은 작품이 팔렸다. 구매자를 찾으니 갤러리스트였다. 2006년 뉴욕 뉴호프 갤러리에서 전시 초대전을 가졌다. 이 전시장에 한국의 유명 갤러리스트가 찾아와 작품을 샀고, 2년 후 서울에서의 전시로 이어진다.

"중국의 제2차 문화혁명이 뉴욕 미술계에서 폭발하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 2007년 10월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신문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차이궈창의 회고전을 내년에 연다"면서 "중국 출신 작가가 구겐하임에서 하는 최초의 회고전"이라고 설명한다. 2008년 2월, 김강용은 차이궈창의 전시를 봤다. 작품 수준보다도 차이의 설치 작품은 제작 공정에만 엄청난 돈이 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늑대들이 유리 벽에 돌진해 허공에 솟구친 끝에 머리를 박고 나가떨어지는 작품 '정면충돌(Head On)' 이었다.

현실+상 501-485, 130x162cm, 2005/사진제공=김강용 작가


이러한 전시가 가능하려면 자신에게 꽂힌 미친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걸 알았다. 2008년 서울 전시에 뉴욕 덤보에 작업실을 제공한 후원자가 가장 먼저 방문해 작품을 구매했다. 전시는 대성공이었다. 전시는 2009년 베이징 '중국 미술관' 초대 전시와 상업갤러리인 베이징 T아트센터 초대전시로 이어져 중국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중국 미술관은 전시 직후 작품 구매를 원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너무 낮은 가격이었다.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중국 시장에서의 미술관의 영향력을 간과했다.

뉴욕에서의 첫 성공을 왜 계속 이어가지 않았는지 물었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이어가지 않은 게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택한 선택의 결과였다. 뉴욕 일대에는 많은 젊은 한국 예술가들이 있었다. 대부분 스타의 꿈을 꾸고 예술 정신을 추구하면서 공부와 작업을 병행하나 생활에는 무능력하기만 했다. 성공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는 장원급제 의식에 쩐 이들은 뉴욕 도착 후 한국행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거리 화가' 아르바이트로 초상화 한 장에 50~100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센트럴파크에 자리잡은 이들은 운 좋으면 하루에도 수천 달러를 벌었다. 그들은 접시는 닦아도 그런 그림은 그리지 않았고 어쩌다 돈을 벌면 코리아타운에 가서 술을 먹었다. 의식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났다.

현실+상 1601-1517, 125×50cm, 혼합기법, 2016/사진 제공=김강용 작가


당시 50대 중후반의 김강용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후배들에게 작가로서 살아가는 방식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 젊은 시절부터 특유의 친화력을 가진 김강용, 김인옥 부부 집에는 후배들이 들끓었다. '예술가 신화'에 이르는 길은 작품으로 주목받되 사회와 소통하고 현실 감각을 갖추는 게 기본 덕목임을 보여주어야 했다. 뉴욕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을 오가야 생존할 수 있음을 전파했다. 한국을 오가는 '셔틀(shuttle) 화업'의 전략을 택했다.

2006년 뉴욕 전시 가격은 100호 기준 한 점당 4만달러였고 한 단계 도약을 위해서는 10만달러 가치로 높여야했다. 시간을 필요로 할 즈음 뉴욕 작업실을 제공한,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해 100억원대 지원을 약속했던 후원자가 사고로 숨지는 불행이 닥쳤다. 201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도 김강용에 관심을 보였다. 현지 전시 후 꾸준한 지원을 약속한 독일 베를린의 모 중견 화랑은 수년 전부터 쇠락해 파트너 자격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현실+상 1109-1189, 200×260cm. 2011/사진 제공=김강용 작가


김강용의 최종 목표는 2000년 백남준, 2008년 차이궈창, 2011년 이우환이 초대받은 뉴욕 구겐하임 전시다. 백남준은 독일, 중국계인 차이궈창은 일본, 이우환은 일본과 프랑스에서 활동한 후 구겐하임을 공략할 수 있었다. 김강용은 이러한 중간 과정을 필요로 한다.

중국 현대 미술은 '정치적 팝(political pop)'과 '냉소적 사실주의(cynical realism)'로 특징지워진다. 이는 역설이게도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2000년대까지 20여 년간 국가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에서 반체제적이고 저항적인 '차이나 아방가르드'가 있어 가능했다.

반면 최근 몇 년 사이 단색화로 대표되는 한국미술은 K팝에 이어 등장할 K아트를 대표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다. 1970~1980년대에 형성된 추상회화는 2000년대 단색화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성찰과 명상의 시대는 결코 아니었다. 동시대를 대변한다고 보기 힘들다. 현실에서도 단색화는 국제 미술 시장에서 독립된 사조로 인정받지 못한다. 지엽적인 이익에 매몰된 국내 양대 경매사를 가진 메이저 갤러리들의 프로모션 때문이기도 하다. 김강용은 잠시 붐을 이루던 극사실화 계열에 포함되었으나 2010년대 이후에는 자신만의 장르를 개척하고 있다.

[심정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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