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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마저도 그리워요“

입력 2021.01.01 0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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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아포리즘-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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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브레스트 감독의 영화 '여인의 향기' #201

아르헨티나 출신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탱고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탱고에 대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정의를 수차례 내렸는데. 난 그중 두 가지를 기억한다.

하나는 "탱고는 라플라타(Rio de la Plata)강의 오페라 아이다(Aida)이다"는 문장이다. 라플라타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경계를 흘러 대서양으로 들어가는 강이다. 유속이 느리고 강폭이 넓은 큰 강이다. 실제로 가서 보면 거대한 흙탕물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탁하다.

근대 초기 돈을 벌기 위해 신대륙을 찾아온 이민노동자들은 이 거대한 흙탕물을 보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보카 항구에 도착했다. 보카 항구는 그들에게 희망이자 눈물이었고, 일터이자 휴식처였다. 탱고는 바로 그곳에서 태어났다. 나일강이 아이다를 만들었듯 라플라타는 탱고를 탄생시켰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말이 "탱고는 우리가 저지른 적 없는 잘못과 경험해보지 않은 불행에 대해 한탄하게 만든다"는 문장이다. 이미 내 앞에 왔다간 슬픔은 물론 앞으로 닥쳐올 슬픔마저도 미리 절망하게 만드는 묘한 작열감. 이것이 탱고의 매력이다.

실제로 이민 초기 보카 항구의 남녀 비율은 50대1이었다고 한다. 이민노동자들에게 사랑은 전쟁이었을 것이다. 탱고의 악센트는 그 전쟁의 산물이다.

인천을 떠난 비행기가 시카고를 거쳐 34시간이 걸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할 때까지 난 어떤 모임에서 만났던 한 여인이 내게 들려준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인은 외교관 자녀로 태어나 서른 살이 될 무렵까지 무려 11개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었다. 모임에서 우리는 그녀에게 "살아본 나라 중 어느 나라가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어눌한 한국어로 말했다.

"아르헨티나요."

우리가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그냥 공기마저도 그리워요."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는 좋은 공기라는 뜻이다.

그렇다. 아르헨티나는 내게 '탱고'와 '공기'로 다가왔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실수할까봐 탱고 추기가 두렵다는 여인에게 알 파치노가 한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탱고를 출 때 실수라는 건 없어요. 아가씨, 삶에서도 마찬가지죠. 간단한 겁니다. 그 점이 바로 탱고를 더 멋지게 하는 거죠. 당신이 실수를 하고 스텝이 꼬이는 일, 그게 바로 탱고이고 인생이죠."

[허연 문화선임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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