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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강에선 사랑이 식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입력 2021.02.11 0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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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홍익출판사 [허연의 아포리즘-88] #202 - 나일강 上

이집트 카이로 기자에 있는 쿠푸왕 피라미드 앞에서 나는 미셸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를 읽었다.

날은 더웠다. 섭씨 40도를 넘는 대기는 지구의 종말을 상상할 만큼 답답하고 힘겨웠다. 쿠푸왕의 피리미드로 들어가는 어두컴컴한 입구는 여기에 머물렀거나 들렀던 모든 인간의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이 어둡고 음습한 통로를 스쳐간 모든 사람들의 한숨과 땀과 눈물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4500년 전 이 피라미드를 건설했던 무고한 백성과 노예들, 그 이후 이 피라미드를 훼손한 도굴꾼들과 백인 탐험대와 관광객들까지.

고대로 가는 이 의미심장한 입구에서 나는 '소립자'를 읽었다. 쿠푸왕 피라미드의 두려운 그림자 앞에서 나는 한없이 부질없어지는 소설의 주인공 부뤼노와 미셸의 자멸에 한없이 공감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궁극의 소립자'였다.

나일강은 길고 느렸다. 삶과 죽음, 현대와 고대가 뒤엉켜 흘러가는 강물 앞에서 이방인들은 사진을 찍었고, 현지인들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 아잔 소리에 맞춰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렸다. 시간은 나일강처럼 더디게 흘렀다.

매일 매일 눈을 뜨면 모든 채색은 지워지고 황토색으로만 남은 상형문자 가득한 거대한 신전의 기둥을 들여다보았다. 그 기둥에 새겨진 염원과 기다림이 내게 이식되는 섬뜩한 순간들이었다. 한 자 한 자 영적으로 나를 흔들었다.

신전을 세웠던 남자들은 모두 사랑이 식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이 죽어가는 건 더더욱 볼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상징하는 모든 것들이 고개를 숙여 자신을 경배하도록 신전 기둥에 새겨 놓았다. 그들은 그렇게 죽음과 맞섰다. 사랑이 식거나 죽는 꼴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들도 결국은 사하라의 먼지가 되었다. 아니면 미쳐버렸거나.

그 저항의 기록. 망각마저도 극복하려고 했던 뼈아픈 기록이 기둥에 남아 있었다.

나일강은 혼란스러웠다. 카이로에서 아스완까지 3박4일 동안 내려가는 나일크루즈는 환희와 경멸이 뒤섞인 묘한 혼돈 속에 나를 밀어넣었다. 말이 크루즈일 뿐 내가 탄 유람선은 다닥다닥 붙은 작은 침실과 식당이 있는 커다란 이동수단일 뿐이었다. 벌집처럼 네모난 컨테이너를 벽돌 쌓듯 차곡차곡 쌓고, 그 한 칸 한 칸에 사람이 들어차 있는 형태였다.

천천히 흘러가는 배에서 바라다보는 나일강변 이집트의 시골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하나도 화려하지 않아서 더 아름다웠다.

그 옛날 수천 년 전 농부들이 그래왔듯 검은 아프리카 물소를 앞세워 밭을 가는 모습은 파피루스에 새겨진 문양만큼이나 평면적이고 조용했다. 이름 모를 새들이 석양 아래 떼지어 날아가는 모습도, 유적지 위로 느릿느릿 지는 붉다 못해 검은 색인 태양도 수천 년의 연대기처럼 유장했다.

[허연 문화선임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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