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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으로 사랑을 했고, 책으로 밥을 먹었다

입력 2021/07/19 03:01

장 폴 사르트르


[허연의 아포리즘-97]

# 그리고 책이 남았다- 4

너무나 작은 키에, 사시였으며, 게다가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상실한 소년이 있었다. 한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외할아버지 집에서 살아야 했던 소년은 마을의 놀림감으로 상처뿐인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 불운한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을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타인은 곧 지옥'이라고 외치며 집에 숨어 지내야 했던 이 소년을 구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그에게는 '책'이 있었다. 그는 외할아버지의 오래된 서가에서 삶의 좌표를 발견한다. 소년은 책을 손에 들기 시작하면서 거친 세상을 향해 생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장 폴 사르트르 이야기다. 사르트르는 훗날 외할아버지 서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뭉툭한 고대의 유물에 둘러싸여서 이 작은 성당 속을 뛰어다녔다. 내가 태어나는 것을 보았고, 또 나의 죽음을 지켜볼 유물들, 그 영원한 존재가 평온한 미래를 내게 약속해 주었다. 나는 그것을 만져보았다. 먼지가 손에 묻는 것이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외할아버지인 샤를 슈바이처는 엄청난 고전 애호가였다(아프리카에서 인도주의 활동을 했던 유명한 목사이자 의사인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그의 조카다). 독서로 무장한 품격 있는 교양을 지니고 있는 빼대 있는 외할아버지는 사르트르에게 일종의 구원자였던 셈이다.

세상에는 책으로부터 구원받은 수많은 소년 사르트르가 있었을 것이다. 필자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가난했고, 몸이 약했으며, 턱없이 예민했고, 너무나 많은 걸 기억하는 몽상가였던 나는 제도 교육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책이었다. 집안 창고에서 발견한 1950년대에 출간된 세로쓰기 세계문학 전집을 읽으며 나는 나를 발견했고, 공간과 시간을 확장하는 법을 체득하기 시작했다. 골방에 켜져 있던 흐릿한 알전구 밑에서 누런 갱지에 인쇄된 활자를 보면서 세상을 만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책을 통해 나 자신을 이해했고, 책을 통해 사랑을 했고, 책을 통해 초월을 경험했고, 책을 통해 밥을 먹었다.

책은 내게 계시였으며 친구였고, 또 무기였다.

나는 늘 책과 함께 있었다. 휴가병이었던 시절 귀대하는 시골 버스 안에서도, 어머니를 묻고 돌아온 날 창가에서도, 사랑의 환희에 들떠 있을 때도, 몸져누웠던 병원에서도, 수천 년 전에 세워진 피라미드 앞에서도 나는 늘 책과 함께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늘 책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책이라는 문명의 입석들로부터 나는 유일하게 뭔가를 배웠으며, 유일하게 패배했고, 유일하게 고개를 숙였다.

[허연 문화선임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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