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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한 추상미술의 거장…유영국 20주기 기념전 [아트마켓 사용설명서]

입력 2022/07/16 03:01
수정 2022/07/16 03:27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오는 8월 21일까지 개최되는 유영국 20주기 기념전 'Colors of Yoo Youngkuk’ 전시장.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아트마켓 사용설명서-24] 한국의 추상미술 선구자이자 1세대 모더니스트인 유영국 화백의 작고 20주기를 맞아 4년 만에 유영국 개인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와 제2차 세계대전, 해방, 한국전쟁 등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몸소 겪었지만 삶에 대한 밝은 희망과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놓지 않았다. 유영국의 그림이 특유의 색채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이런 그의 정신이 담겼기 때문일 터.

국제갤러리는 오는 8월 21일까지 유영국 20주기 기념전 'Colors of Yoo Youngkuk'을 국제갤러리 K1, K2, K3 전관에서 개최한다. 최근 BTS(방탄소년단)의 멤버 RM이 전시회를 찾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증샷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난 유영국은 식민지 제국 문화의 중심지였던 일본 도쿄 문화학원에 입학해 처음 추상미술을 접했다. 당대 전위적 예술 운동의 최전선에 있던 추상미술의 대가 무라이 마사나리, 하세가와 사부로 등을 따라 20세기 전반의 전위적인 당대 미술 경향이었던 초현실주의에 깊이 매료됐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일제 대동아 공영권(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선언으로 군국주의 정책이 강화됐다. 전위미술에 대한 탄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유영국은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모색했고, 이때 한국 경주의 남산 불상을 소재로 한 사진 콜라주 연작이 탄생했다.

태평양전쟁이 절정으로 치달은 1943년 귀국한 그는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기간 동안 한 가족의 가장으로, 어부로, 그리고 양조장 경영인으로 살며 생업과 작품활동을 힘겹게 이어갔다. 이 시기에도 작가는 틈틈이 작품을 제작하며 '신사실파(Sinsasilpa·1948)', 모던 아트협회(1957), 현대작가초대전(1958), 신상회(新象會·1962) 등 한국미술 단체를 두루 이끌었다.

유영국 20주기 기념전 'Colors of Yoo Youngkuk' 전시장. 평생 산(山)을 모티브로 강렬한 색채와 기하학적 요소를 통해 자연의 장대함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유영국의 작품에는 자연의 숭고미가 응축돼 있다.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마흔여덟 살이 되던 1964년 모든 미술 단체활동을 중단한 유영국은 개인 작업 활동에 몰두하며 전업 미술작가가 돼 첫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 시기 발표된 다양한 드로잉과 산(山)을 모티브로 한 대형 추상회화들은 그가 '잃어버린 시간'이라 일컬은 지난 20년을 만회하려는 듯 압도적인 집중력과 에너지, 대담한 구상과 화체를 통해 자연 풍경과 마음의 심연을 심도 있게 펼쳤다.

새로운 예술적 기법뿐만 아니라 표현적 다변성을 고심하던 작가는 오리엔탈 사진학교(Oriental Photographer's School)에서 수학하며 사진을 통한 새로운 조형 질서를 탐구함과 동시에 점, 선, 면, 형, 색 등 기본 조형 요소를 중심으로 구축된 자연 추상이라는 자신만의 추상 세계관을 갖게 된다.

유영국은 색채를 서서히 쌓아 올리고 두텁게 만드는 등 철저히 계산된 구도와 색채의 선택을 통해 작가적 세계관의 외연을 확장해 나갔다. 특히 1970년대 작품에서는 비정형적 추상에서 기하학적 형태로의 전회가 두드러지는데 빨강, 파랑, 노랑 등 색의 삼원색을 기반으로 군청, 초록, 보라, 검정 등 다양한 색채의 변주도 함께 일어난다. 마치 강렬한 색채를 바라보다 잠시 눈을 감으면 일어나는 색채의 잔상을 한 화폭에 펼쳐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유영국의 주요 작품 세계를 망라하는 이번 전시는 산과 자연을 모티브로 강렬한 원색과 기하학적 구도로 절제된 조형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영국 작품만의 예술사적 의미를 조망하는 자리다. 다채로운 추상미술과 조형 실험의 궤적을 중심으로 시기별 대표 회화작품 70점, 드로잉 22점, 그리고 추상 작업의 일환이자 새로운 기법과 시도를 보여주는 1942년 사진 작품과 작가의 활동 기록을 담은 아카이브 등으로 구성됐다.

K2에서는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의 추상 조형작들을 중심으로 강렬하고 원초적이지만 서사와 균형이 있는 중후기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집요하게 천착해온 점, 선, 면, 형, 색이라는 기본적인 조형 요소가 완숙기에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색채와 구도가 만들어내는 완급은 자연의 원형적 색감을 환기시킨다.

유영국의 'Work'(캔버스에 유채, 53×65.1㎝, 1979년). <사진 제공=케이옥션>


특히 1970년대 후반 그림은 환상적이고 웅장하며 한편으론 서정적이다. 1977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심장박동기를 달았고 10여 차례 수술 등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던 때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어록을 남긴 그는 그림의 허기를 색으로 풀어냈다. 유영국의 기하학적 추상화에 장대한 자연의 숭고미가 응축돼 있는 이유다. 마치 마음으로 본 것 같은 추상적 풍경을 통해, 유영국은 지금도 우리에게 풍경 없이 풍경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일깨워준다.

한편 산과 나무를 형상화한 유영국의 추상화 'Work'(캔버스에 유채, 53×65.1㎝, 1979년)가 오는 20일 케이옥션 경매에 나온다. 추정가는 3억~4억5000만원이다. 지난해 6월에는 '영혼'(캔버스에 유채, 129.3×161.2㎝, 1965년)이 12억70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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