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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위 '출판대국' 일본...그 시발점은 '야설' 이었다?

입력 2021/10/09 06:01
수정 2021/10/10 03:32
[한중일 톺아보기-73]
※ '한중일 톺아보기'는 한중일을 중심으로 아시아와 관련된 크고 작은 이슈를 살펴보는 주간연재코너입니다.

도쿄 치요다구 간다 진보초 고서점 거리. 고서점 160여개가 몰려 있는 세계 최대 고서점가로 알려져 있다.[사진=치요다구 관광협회]


전자판 규모가 늘고 있다곤 하나 일본에서 출판은 보통 사양 산업으로 인식된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전철을 타도 과거와 달리 대부분 스마트폰 화면에 몰두할 뿐, 책을 읽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일본은 최근까지 전 세계에서 3~4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출판 시장이다. 발행 부수 기준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요미우리신문이 있고 아직까지 조간과 함께 석간신문을 같이 발행하는 신문사들이 상당수 존재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일본 출판업의 규모나 수준은 중국과 유럽은 물론 조선보다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중반에는 일본의 3대 도시(교토, 에도, 오사카)를 중심으로 200여 개 출판업자들이 경쟁하게 됐다. 당시 서점은 대개 판매뿐 아니라 인쇄와 출판까지 겸하고 있었는데, 18세기가 되자 이런 곳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매년 1천 여종의 책이 출간됐고 지방으로 서점들이 퍼져나가면서 19세기에는 일본 어디서든 원하는 책을 입수해 읽을 수 있게 됐다. 이처럼 일본의 출판 분야가 급성장한 계기는 뭘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400년 전 에도시대(江戶時代) 까지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초닌 계층의 성장과 이하라 사이카쿠

에도시대 사농공상은 지배계층인 무사 아래 나머지는 직업의 차이일뿐 신분상 높고 낮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긴 전쟁과 혼란의 시대가 끝나고 평화가 도래하자 일본의 인구는 빠르게 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이면서 도시의 발달도 빨라졌다. 생존에 대한 걱정이 덜하니 삶을 즐기려는 사회적 욕구도 고조됐다. 활자 문화 소비, 문학적 욕구도 그중 하나였다. 한반도와 유럽을 통해 도입된 활판 인쇄술도 이 같은 욕구를 자극했다. 특히 목판 인쇄술의 발달은 책이라는 매체의 대량 생산과 유통 체계를 갖추게 해주는 필요조건이었다.

하지만 17세기 중기까지만 해도 교토를 중심으로 유통되던 역사서나 불서(佛書) 등은 너무 어렵고 재미가 없어 상류층의 전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변화를 몰고 온 계층이 바로 초닌(町人), 조선으로 따지면 중인에 속하는 상인 계급이었다.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엄격히 존재했기에 이들 초닌들이 사무라이처럼 정치권력을 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장사를 통해 확보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에도시대 일본이 신분제에서 조선과 달랐던 점 중 하나는 상인의 위상이 사실상 농민, 공인을 앞서 무사 계급 다음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 초닌들은 돈에 집착했지만, 한편으로 신분적 한계라는 벽에 부딪혀 돈의 의미와 유한성에 회의감을 느끼는 입장에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자신에게 그어진 한계에 대한 불만과 욕구를 글로 표출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사카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오사카 이쿠쿠니타마신사에 있는 이하라사이카쿠의 동상. [사진=위키피디아]


이하라 사이카쿠는 원래 10대 중반부터 일본 시의 한 장르였던 하이카이(俳諧)를 짓던 시인이었다. 문학적 소질이 있어 약관의 나이에 이미 하이카이 비평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던 중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낸 첫 소설이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이었다. 호색일대남은 소위 대박을 터뜨렸고 에도시대 일본 출판에 큰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호색일대남 이후로도 그는 '호색오인녀' '호색일대녀' '남색대감' 등 소위 호색물 계통의 소설을 잇달아 내놓으며 작가로서 일약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생전에도 유명했지만 사후 더 높은 평가를 받아 현재 일본에서 근세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호색일대남'의 인기와 '우키요조시'

호색일대남 1권 '9세 남에게 들켜서는 안될 짓'에 수록된 삽화. 요노스케가 하녀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다.


호색일대남은 제목 그대로 '일생을 호색에 몰두한 남자에 관한 일대기'다. 주인공 요노스케(世之介)가 만 7세부터 60세가 될 때까지 54년간 일본 전역을 돌며 행한 파란만장한 성(性) 편력을 그렸다. 1년에 1개 에피소드씩 총 54장 8권으로 구성돼 장마다 삽화를 넣어 독자의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했다.

호색일대남은 표현이 노골적이거나 저급하지 않으면서도, 적나라한 성교행위를 상당히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컨대 1권 4장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남자의 동작이 거칠어지고 여자는 진짜로 울음소리를 내게 되니, 저절로 베개가 튕겨 나가고 머리빗이 부러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침소에선 "아아, 이제 그만"이라며 휴지로 닦는 소리가….』 이런 점에서 호색일대남은 속된 말로 '야설' 즉 일종의 '포르노'라고 할 수 있다. 60세가 되는 해 요노스케는 영원히 애욕을 즐길 수 있는 뇨고(女護)의 섬으로 호색호(好色丸)를 타고 떠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영화판 호색일대남(1961년작). 기생부터 하녀, 친척, 남의 아내, 미소년 까지 요노스케가 관계를 맺은 대상은 여성 3742명, 남성 725명에 달했다.


한편으로 호색일대남은 형식과 주인공 설정, 내용 전개에 있어 일본이 세계 최초 장편 소설이라고 자찬하는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패러디하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당시 일본의 세속적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면서도 피지배 계층의 심적 세계를 객관적으로 반영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호색일대남 출판 이전에는 권선징악 등 교훈적 내용을 담은 작품이 일본 풍속 소설의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이후 오락성이 확연히 두드러지는 소설들이 쏟아졌는데 후대 일본인들은 이 같은 형식을 '우키요조시(浮世草子)'라며 하나의 장르로 구분 짓기 시작했다. 이에 오늘날 호색일대남은 우키요조시를 개척한 효시로 불린다.

우키요조시는 호색일대남처럼 질펀한 향락생활을 다룬 호색물이 주류였지만, 이 밖에도 무사도에 대한 잡화(雜話),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괴담, 서민의 경제생활 등 폭넓은 범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시 등과 달리 호색일대남을 읽고 재미를 느끼는데 높은 교양 수준은 필요하지 않았다. 당시 유행하던 유흥에 대한 지식 정도면 충분했다. 덕분에 초닌은 물론 서민들 사이에서도 널리 소비될 수 있었다. 일본의 출판문화가 성립하고 발전한 중심지는 원래 교토였다. 하지만 호색일대남을 기점으로 오사카가 급성장해 교토의 아성을 넘볼 정도가 됐다.
베스트셀러와 대여서점 등장으로 탄력받은 출판 붐

도카이도주히자쿠리게 작가인 짓펜샤이쿠가 1802년에 그린 에도시대 서점.[사진=도쿄도립도서관]


이후 17세기 말부터는 에도를 중심으로 구사조시(草双紙)라는 오락용 그림책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약 200년간 출판됐던 구사조시는 보통 권당 10쪽씩 총 5권 내외에 장마다 그림을 중심으로 설명이 곁들여졌다. 에도를 중심으로 출판산업이 탄력을 받으면서 '베스트셀러'도 속속 등장했다.

판매량이 1천부를 돌파하면 '베스트셀러'에 해당하는 '센부후루마이'(千部振舞)라는 말이 쓰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서점 직원들이 총출동해 조상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곤 했다. '도카이도주히자쿠리게'(東海道中膝栗毛)라는 여행소설도 그중 하나였다. 남성 2명이 일본 전역을 여행하는 설정을 해학적으로 그린 이 작품은 3만권이 넘게 팔리며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책이 딱딱하고 어려운 학문 목적보다 여가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상업출판 시장은 한층 탄력이 붙었다. 출판업이 성행하고 서점이 늘자 서민층의 책에 대한 접근도도 더 높아졌다. 하지만 당시까지 책은 서민층이 부담 없이 구매하기에는 고가 품목이었다. 이때 등장한 게 소위 대여서점(貸し本屋)이었다.

에도시대 책대여업자들의 모습.


대여서점의 시스템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임대 일수에 따라 임대료가 결정됐고 연체와 분실 및 파손이 있으면 변상비도 내야 했다. 인기 서적의 경우 장기간 대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인기가 있는 분야는 주로 호색물부터 정치 풍자나 해외 풍물에 대한 것들이 많았다.

책 대여가 활성화되면서 에도 후기에 이르자 에도에만 650여 곳의 대여서점이 생겨났다. 대여서점 1곳당 170명 정도의 단골손님이 드나들었다고 하니, 대략 11만명 이상의 에도 주민들이 대여서점을 이용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책을 대여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읽거나 구매해서 읽는 사람들까지 감안하면 독서 인구 자체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18세기 말이 되자 인구 100만의 에도에서만 매년 수백 종의 서적이 출간됐다. 에도가 일본 출판문화의 중심이자 제1의 출판 시장으로 떠오르며 일본 내 상업출판의 붐이 본격적으로 일었다.
메이지유신과 에도시대, 그리고 출판 혁명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에 진입해 개항을 요구했던 미국 흑선을 그린 목판화(1854년).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했다. 반면 조선은 근대화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조선과의 운명을 가른 중심에는 분명 메이지 유신이 있지만, 이 하나의 사건과 시점에만 천착하는 건 사실 단선적이며 반쪽짜리 이해다. 그들이 개혁에 성공하고 도약할 수 있었던 건 단지 그 시점에 운 좋게 얻어걸린 게 아니었다. 그 이전인 에도시대부터 축적됐던 변화를 위한 여러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 배경 한켠에는 출판업의 성장이 있었다.

정보와 지식의 공유와 유통은 사회 변혁의 단초가 되며, 출판은 국민 계몽에 필수적이다. 일부 학자들은 250년 남짓한 에도시대에 최소 10만종 이상의 신간 서적이 출판되었다고 주장한다. 에도시대가 유신의 전야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에도시대 일본의 변화를 한번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건 근대 이후 치욕의 역사를 제대로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호색일대남은 일견 외설적이고 기괴해 보이지만, 일본 내에서 문학사적으로 높게 평가된다. 무엇보다 그 이상으로 근대 이전 일본의 출판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하라 사이카쿠와 그로부터 시작된 우키요조시라는 장르가 일본의 출판 혁명을 부르는 촉매 역할을 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단 기자페이지 '+구독' 을 누르시면 다음 기사를 빠르고 쉽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관련 뉴스 제보나 의견을 메일로 보내주시면 소중히 검토후 차후 꼭 반영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신윤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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