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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모니터 배터리까지..'이것'의 변신은 무죄

입력 2021/10/16 06:01
수정 2021/10/20 02:20
[사이언스라운지] 종이는 무엇으로 만들까, 또 종이로는 무엇을 만들까.

상식적으로 답하자면 쉬운 질문이다. 종이는 나무로 만든다.나무에서 나온 펄프로 만들어진 종이는 책과 공책, 포장지, 최근 들어서는 종이빨대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종이를 나무로만 만드는 게 아니다. 지난해에는 '꽃가루'로 만든 종이가 세상에 알려졌다. 꽃가루는 동물로 치면 정자에 해당하는 생식세포를 멀리 전달하기 위한 기관이다. 종족 번식이라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특성이 있다.

지난해 4월 조남준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 연구팀은 해바라기 등 꽃의 꽃가루를 가공해 젤리 형태의 소재를 만들고, 이를 건조시켜 종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딱딱한 꽃가루를 염기성 용액에서 오래 배양해 부드럽게 바꾸고 여기에 수산화칼륨 수용액을 넣고 80도의 열을 가해 12시간 동안 배양했다. 꽃가루는 서로 뭉쳐져 끈적한 형태의 젤이 됐고, 이 젤을 건조시키니 나무의 섬유질인 펄프가 엉겨 종이가 되듯이 꽃가루도 종이가 됐다. 연구진은 이 종이에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인쇄했다. 이들의 연구 성과는 미국 국립과학원회보에 발표됐다.

꽃가루 종이에 인쇄한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왼쪽)과 일반 종이에 인쇄한 그림. <조남준 교수>


이 종이는 제조 조건에 따라 다양한 특성을 가진 '만능종이'이기도 했다. 제조 과정에서 공기 중에 노출을 시키면 투명한 종이가 됐고, 노출을 시키지 않으면 불투명한 종이가 된다. 두께와 표면 거칠기를 조절하면 습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늘어나거나 수축했다. 이러한 '꽃가루 종이'의 특성은 근육이나 모터 없이도 움직일 수 있는 소프트 로봇을 만들 수 있다.

오징어와 누에고치 연골로 투명하고 강하면서 자연에 무해한 나노종이를 개발한 연구진도 있다. 울산대학교 진정호 첨단소재공학부 교수와 박장웅 교수, 배병수 KAIST 교수 연구팀이 2018년 개발한 나노종이는 오징어 연골의 주 구성물질인 키틴 나노섬유와 누에고치에서 추출한 실크단백질을 혼합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이 나노종이는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면서도 고성능 합성 플라스틱과 유사한 수준의 기계적인 강성을 나타내고, 자연에 해가 되지 않는 생분해도 가능했다.

이 나노종이는 유리만큼 투명해 스마트 콘택트렌즈와 스마트폰 강화유리를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게 연구진의 기대다. 관련 연구 결과는 2018년 6월 신소재 분야 저널인 '어드밴스트 펑셔널 머터리얼스'의 표지논문에 실렸다.

2018년 6월 '어드밴스드 펑셔널 머터리얼스' 표지논문 <어드밴스트 펑셔널 머터리얼스>


종이의 활용처도 넓어지고 있다. 왕중린 중국과학원 나노 에너지·시스템 연구소 교수팀은 2017년 걸으면서 충전이 되는 초경량 종이 배터리를 개발했다. 걸으면서 신체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와 마찰전기를 전기에너지로 바꿔 저장한 후 활용하는 방식이다. 종이로 만든 격자 모양의 구조체 안쪽 면에는 마찰전기를 일으키는 불화에틸렌프로필렌(FEP) 필름과 전극 역할을 하는 금을 입히고, 바깥쪽 면에는 전기를 저장하는 축전기의 양극 역할을 하는 흑연과 금을 입혔다. 몸이 움직이면서 격자 모양의 구조체가 눌렸다 펴지고, 이를 통해 마찰전기가 발생되면서 충전이 된다. 이 종이 배터리는 단 몇 분 만에 전자시계와 리모컨을 작동시킬 수 있을 정도의 전기를 만들어냈다.

잉크젯프린터로 종이 위에 출력한 배터리(아래)와 이를 적용한 온도감지컵. /사진=UNIST


2016년에는 국내 연구진이 일반 잉크젯 프린터를 이용해 문서를 출력하듯 배터리를 제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종이 위에 출력한 글씨나 그림을 전원으로 사용한 최초의 연구 사례이기도 하다. 이상영 UNIST 에너지·화학공학부 교수팀은 먼저 일반 A4용지 표면에 나노 셀룰로오스 소재를 뿌려 잉크가 번지거나 이탈될 확률을 낮췄다. 이후 전지의 모든 구성요소를 잉크 형태로 만들어 잉크젯 프린터를 통해 인쇄했다. 이렇게 출력한 전지는 1만회 충·방전 반복 시험 결과 용량이 줄어들지 않았고 150℃ 고온에서도 전지의 특성을 유지했다. 연구진은 한반도 지도 형태로 전지를 출력해 LED 램프를 켜고, 물 온도에 따라 다른 색깔의 등불을 켜는 유리컵을 만들었다.

종이 반도체 개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2016년 KAIST 연구팀은 정밀 반도체 회로를 종이로 만든 칩 위에 전사한 종이반도체를 만들었다. 기존 반도체보다 경제적이고 친환경적이기 때문에 짧은 시간만 사용하고 버려지는 전자제품에 활용할 수 있어 주목받았다.

[이새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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