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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 일군 것은 누구일까…'가려진' 주인공의 이야기 [사이언스라운지]

입력 2022/03/05 06:01
수정 2022/03/05 06:07
[사이언스라운지] "철강은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필수이고 기반입니다. 자금이 많이 들어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사업입니다."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36세의 유학생 김재관 박사는 '한국의 철강공업 육성 방안'을 준비해 내밀었다. 당시 대통령은 내심 놀랐다.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추진하려 했지만 경제성과 기술성이 없다는 이유로 세계은행(IBRD) 등에서 자금을 지원해주지 않아 포기 직전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매경DB


김재관 박사는 이후 귀국해 포항종합제철소의 마스터플랜을 설계·주도하고, 상공부 초대 중공업차관보를 맡아 자동차 산업을 포함한 한국의 중화학공업을 일으키고, 한국표준연구소를 설립해 대한민국 산업이 백년대계를 세우게 된다.

'한강의 기적'은 대한민국이 한국전쟁 직후부터 반세기 만에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뤄낸 것을 의미한다. 1945년 1인당 국민소득이 45달러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은 50년 후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돌파한다. 한강의 기적과 함께 거론되는 인물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포항제철을 설립한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현대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 등이다. 물론 이들의 노력이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만'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올해 나온 신간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기 위해 정부 장학생으로 독일에서 유학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포항제철·현대조선·현대자동차 등 한국의 철강·중공업 산업 육성의 밑그림을 그린 1호 '유치과학자' 김재관 박사의 일대기를 그린 평전이다.

故 김재관 박사 /사진=매경 DB


김재관 박사는 1966년 해외에서 연구생활을 하고 있던 과학자 18명을 1호 유치과학자로 불러들일 때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가난했던 대한민국의 정부 장학생으로 유학길을 떠나 뮌헨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까지 총 네 가지 학문을 연구했다. 첫 번째는 기계공학이었다. 기계공학이 발전하려면 철강학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후에는 철강학에 몰두했고 이후에는 철강학의 뿌리인 금속학을 파고들었다. 마지막으로는 자동차공학으로 눈을 돌렸다. 그가 공부한 기계·철강 금속학은 대한민국의 제철소와 자동차 공장 설립으로 열매를 맺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종합제철소 설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대일 청구권 자금' 협상의 전면에 나서 연 103만t 규모의 제철소 설립안을 관철해 자금을 따냈고, 그가 손수 설계하고 구획한 포항제철(POSCO) 평면은 20년 동안 기본 설계 변경이 필요 없을 정도다. 48년6개월을 활약하다 지난해 말 은퇴한 포항제철 1고로를 설계한 주인공이 김재관 박사다.

포니 자동차 /사진=현대차 제공


고 정주영 회장의 '500원 지폐 거북선' 전설의 바탕에도, 최초의 한국형 승용차 '포니(PONY)'의 숨겨진 이면에도 김재관 박사가 있었다. 그는 정주영 회장의 동생이자 지금은 '포니 정'으로 더 잘 알려진 정세영 사장에게 대한민국 고유의 자동차를 만들자고 제안한 주인공이다. 책 속에 소개된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정주영 회장과 함께 찾아온 포니 정에게 "정주영 회장께서 우리의 숙원사업이었던 조선을 시작했으니 정 사장은 우리 고유의 자동차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차를 만들자면 금형 값이 많이 들 텐데, 금형 값을 절약하려면 모델을 변경하지 않는 차를 만들어라"고 말한다. 그의 제안에 형제는 "쉽지는 않지만 우리가 해보겠다"고 답한다.

한국 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은 입을 모아 '한국의 경제 기적 뒤에 가려진 김재관 박사 같은 과학기술자들의 업적과 헌신이 외면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신성철 전 KAIST 총장은 "한 과학자의 미래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열정과 헌신이 한강의 기적을 성취하는 데 기여했다"며 "김재관 박사는 한국 종합제철소의 시작을 견인하고 중공업과 자동차 산업을 기획했으며 국가 표준을 수립해 한국 선진화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김원준 KAIST 기술경영학부 교수는 '왜 지금 김재관 박사를 돌아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과학기술이 날로 중요해지고 있는 시대에 중요한 부분은 과학기술인이 한국 경제 성장 모델을 디자인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동안 우리 사회는 정치인, 기업인을 영웅으로 치켜세웠지만 이들이 큰일을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김재관 박사와 같은 과학기술인의 초기 디자인 덕"이라며 "특히 대선이라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과학기술인의 역할을 되돌아봐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또한 김재관 박사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중 하나인 독일 데마크의 기획실에서 근무하다 한국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귀국했다"며 "한국 사회가 많이 분열돼 있는 상황에서 미래 세대를 비롯한 우리 사회가 이 같은 희생정신을 되새겨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은 "대한민국 100년을 바라보는 김재관 박사와 같은 과학자가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새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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