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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수와 해부루 - 고구려 건국신화 다시 읽기 (3)

입력 2022/05/12 04:05
[고구려사 명장면-149]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주몽신화는 동부여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어지고 있는 유화가 햇빛에 감응하고 주몽이 태어나는 이야기부터는 지난 회에 살펴본 <위서>의 전승과 비슷하기 때문에 첫머리의 동부여 전승 부분만 인용하도록 하겠다.

(가) 부여(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서 자식을 얻고자 산천에 제사를 드리러 가다가,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그 돌을 옮기게 하니 금색 개구리[蛙]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하늘이 내게 자식을 내린 것이다"라고 기뻐하면서 거두어 길렀다. 이름을 금와(金蛙)라 짓고,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나) 후에 재상 아란불(阿蘭弗)은 "하늘[日者]이 내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비옥하고 오곡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하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아란불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옛 도읍지에는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다. (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때에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인을 발견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때에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는 자가 나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수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돌아오지 않아, 부모가 나를 책망하여 우발수에서 귀양살이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와는 이상하게 여겨서 유화를 방 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이 비추어 몸을 피하였으나 햇빛이 쫓아와 비추었다. 그래서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이하 생략)

위 이야기는 독자분들께는 매우 익숙한 내용일 것이다. 해부루와 금와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위 전승은 일종의 동부여 건국 설화라고 할 수 있다. 위 문장에서 (가)와 (나)는 이규보가 지은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의 문장과 일치하기 때문에, 고구려본기 편찬자가 <구삼국사> 기사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다) 금와왕과 유화가 만나는 대목은 <구삼국사>의 기사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또 다른 자료에 근거한 것인데, 그 전거가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고구려본기의 주몽신화에서 위 인용문에 이어지는 문장, 즉 주몽의 탄생과 부여로부터 남하, 그리고 엄시수를 건너는 대목은 <위서>의 기사를 전거로 삼았음은 지난 회에서 언급하였다. 이외에도 다수의 전거 자료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렇듯 고구려본기의 주몽신화는 여러 계통의 자료들을 종합하여 구성한 결과이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때까지 전승되던 여러 자료를 이리저리 엮어서 자신들의 주몽신화를 만들어낸 셈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읽기에는 하나의 내러티브로 이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본기의 주몽신화를 하나의 정전 텍스트로 다루는 방식은 그리 타당하지 않다.

위 해부루 전승에는 2개의 부여가 등장한다. 해부루가 원래 다스리던 부여, 그리고 재상 아란불이 하늘의 뜻을 전하여 도읍지를 옮겨 세운 동부여이다. 그런데 동부여를 세운 땅 가섭원(迦葉原)이 동쪽 바닷가라고 하였으니, 본래의 부여는 동부여의 서쪽 편에 위치하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부여과 동부여라는 나라 이름에서도 해부루가 동쪽으로 나라를 옮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위 전승은 동부여 건국 설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동부여 건국 설화의 주인공은 해부루와 금와왕이지만, 금와왕이 주몽의 어머니 유화를 거두었고, 그곳 동부여에서 주몽이 태어났기 때문에 주몽신화와 깊이 연관된다. 주몽신화의 첫머리에 동부여 설화가 배치된 주된 이유이다. 하지만 이 동부여 설화가 앞머리에서 빠지게 되면 주몽의 출신지가 동부여라는 점은 알 수 없게 된다. 즉 <위서>의 주몽신화와 비슷해진다. 이 점은 주몽의 출자와 관련하여 중요한 점이니 기억하시기 바란다.

그런데 위 인용 글에서 비록 한 줄에 지나지 않지만 본래의 부여 땅에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도읍하였다는 언급이 있다. 즉 해모수 부여 건국 설화의 내용도 살짝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더욱 (다) 문장에서는 하백녀 유화(柳花)의 말을 통해 해모수의 행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해모수 신화의 내용 요소도 일부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해부루의 동부여 관련 설화는 <구삼국사>의 내용을 그대로 옮겼으면서도, <구삼국사>의 주몽신화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고 짐작되는 해모수 신화는 전혀 인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를 짐작하기 위해서 먼저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의 해모수 관련 기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동명왕편>은 고려 후기에 활동했던 이규보가 26세 되던 해인 1193년에 주몽신화를 소재로 오언(五言)으로 읊은 서사시이다. 시 본문과 <구삼국사>에서 인용한 상세한 주(註)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주는 본문 시의 설명 주석이므로, <구삼국사> 동명왕본기의 내용 전체를 그대로 옮기지 않고 이규보가 필요에 따라 발췌하여 인용하였다. 따라서 주석으로 붙인 기사를 모두 모아놓아도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중간중간 빠진 대목이 적지 않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래서 본래 <구삼국사> 동명왕본기에 실려 있는 주몽신화의 내용 전체를 알 수는 없게 되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 서문


아래에서 <동명왕편>의 주석에서 해모수와 관련된 내용을 모두 인용한다. 다만 시의 각 대목별로 <구삼국사>에서 발췌된 기사들이라서 내용상 잘 연결되지 않는 부분들이 곳곳에 있음을 감안하면서 읽어보기 바란다. (○표시로 인용한 각 대목들을 구분한다.)

* 아래 인용문은 단락별로 한 줄 띄어쓰기 하지 않게 편집 부탁합니다

○ 한(漢)나라 신작(神雀) 3년 임술년에 천제(天帝)가 태자를 부여왕(扶余王)의 옛 도읍에 내려보냈는데, 이름이 해모수(解慕漱)였다.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오룡거(五龍車)를 탔고 시종 백여 명은 모두 흰 고니를 탔다. 채색 구름이 하늘 위에 떠 있고 음악은 구름 속에서 울려 퍼졌다.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다가 십여 일이 지나 비로소 내려오는데 머리에는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있었다.

○ 아침이면 정사를 돌보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그를 '천왕랑(天王郞)'이라고 불렀다.

○ 그 여인들이 왕을 보고 곧 물에 뛰어들었다. 신하들이 "대왕께서는 왜 궁전을 지어 여자들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막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왕이 그럴듯하다고 여기고 말채찍으로 땅을 그으니 구리 집이 문득 크고 화려하게 지어졌다. 방 안에 자리 셋을 마련하고 술도 한 동이나 내놓았다. 여인들이 각자 자리에 앉아 서로 권하며 술을 마시다가 크게 취했다.

○ 왕이 세 여인이 크게 취하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나타나 막으니 여인들이 놀라 달아나다가 맏딸 유화(柳花)가 왕에게 붙들렸다.

○ 하백이 크게 분노하여 사자를 보내 말했다. "너는 누구인데 내 딸을 억류하고 있느냐." 왕이 대답하기를 "저는 천제(天帝)의 아들입니다. 이제 하백 집안과 혼인하고자 합니다." 하백이 또 사자를 시켜 물었다. "네가 만약 천제의 아들이고 내게 구혼하고자 했으면 마땅히 중매인을 시켜 말을 했어야지, 갑자기 내 딸을 붙들어두니 이런 실례가 어디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며 하백을 만나려 하였으나 궁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딸을 놓아주려 하였으나 여자는 이미 왕과 정혼하였기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에게 권하여 말하기는 "용이 끄는 수레가 있으며 하백의 나라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왕이 하늘을 가리키며 부르니 얼마 되지 않아 하늘에서 오룡거가 내려왔다. 왕이 여자과 함께 수레에 오르니 바람과 구름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그 궁실에 이르렀다.

○ 하백이 예를 갖추어 맞이하고 자리에 앉자 묻기를 "혼인의 법도는 천하의 공통된 규범인데 어찌 실례를 저질러 우리 가문을 욕보이는가"라고 하였다.

○ 하백이 묻기를, "왕이 천제의 아들이라면 어떤 신이한 능력이 있는가." 왕이 대답하기를 "시험해 보시지요." 이에 하백이 뜰 앞 물에서 잉어가 되어 물결을 따라 헤엄치니, 왕이 수달이 되어 붙잡았다. 하백이 또 사슴이 되어 달아나니, 왕은 승냥이가 되어 쫓았다. 하백이 꿩이 되자 왕은 사냥매가 되어 공격했다. 하백이 진짜 천제의 아들이라 여기고 예를 갖추어 성혼하였다. 왕이 자기 딸과 함께할 마음이 없을까 걱정하여 음악을 베풀고 술을 차려내 왕을 크게 취하게 하고, 딸과 함께 작은 가죽 수레에 집어넣고 오룡거에 실어 하늘로 올려보려고 하였다. 수레가 아직 물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때 왕이 곧 술이 깨어 여자의 황금 비녀로 가죽 수레를 뚫고 구멍으로 혼자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 하백이 크게 노하여 딸에게 "네가 내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 끝내 우리 집안을 욕보였다" 하고는 옆에 있는 신하들을 시켜 딸의 입을 묶어 당기게 하니 그 입술이 세 자나 되게 길어졌다. 다만 종 둘만 주어 우발수(優渤水) 속으로 내쳤다.

○ 어부 강력부추(强力扶鄒)가 아뢰었다. "요즘 어량에 잡힌 물고기를 도둑질해 가는 것이 있는데 어떤 짐승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왕이 이에 어부를 시켜 그물로 끌어내게 하니 그물이 찢어졌다. 다시 쇠그물을 만들어 끌어내 비로소 한 여자를 얻었는데 돌에 앉아 있다가 나왔다. 그 여자의 입술이 길어 말을 할 수 없었으니 세 번 자르게 한 다음에야 말하게 되었다.

○ 왕이 천제 아들의 왕비임을 알고 별궁에 두었더니 그 여자의 품안에 해가 비쳐 인하여 임신하였다.

혹 위 인용문을 처음 제대로 접하시는 분은 읽어보시니 어떤 느낌이 드시는가? 해모수와 유화, 그리고 하백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 전개의 극적인 요소 및 풍부한 내러티브는 지금까지 보던 주몽신화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을 듯싶다. 이러한 풍부한 이야기를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왜 빼놓고 고구려본기에 싣지 않았을까?

이는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지은 이유에서 간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겠다. 이규보는 서문에서 "구삼국사를 구해 동명왕본기를 보니 동명왕의 신이한 자취가 세상에서 말하는 정도를 넘어섰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환(鬼幻)하다고 여겼으나, 거듭 읽어보니 미혹함[幻]이 아니라 성스러움[聖]이었으며, 귀이함[鬼]이 아니라 신이함[神]이었음을 깨달았다"라고 말하면서, 이를 "시로 지어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원래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라고 동명왕편을 짓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아마 이규보가 동명왕본기를 처음 읽고 들었던 괴이하고 미혹스러운 느낌은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앞서 143회에서 주몽 건국 후 골령에 성곽과 궁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구삼국사>와 <삼국사기>의 기사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서 살펴본 바 있다. 유교적인 합리적 사관을 갖고 있던 <삼국사기> 편찬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신이한 내용을 역사서에 그대로 담을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규보가 살던 시대에는 이런 분위기가 바뀌어서 유교적인 중화 중심의 역사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고려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이 확산되고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역사의식이 깊어지면서 오히려 <구삼국사>의 이러한 신이한 신화들이 더욱 자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 것이다. <구삼국사>와 <고구려본기>의 주몽신화를 비교해 볼 때, 위에서 인용한 해모수 관련 신화가 있고 없음이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게다가 <구삼국사>의 주몽신화 중 주요 비중이 이 해모수 신화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매우 풍부한 내용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해모수 신화가 주몽신화의 앞부분을 장대하게 장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해모수가 주몽의 아버지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해모수와 유화가 혼인하여 주몽을 임신하는 것이 아니다. 유화는 금와왕에 의해 방안에 갇힌 뒤에 햇빛에 의해 주몽을 임신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해모수는 주몽의 탄생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오늘날 우리 생각으로는 해모수와 유화의 혼인으로 주몽이 잉태됨이 자연스러운 이야기 흐림이 된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결과적으로 해모수 신화와 주몽의 탄생 전승 사이에서는 하나의 단층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단층에서 주몽신화의 형성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물론 해모수도 태양신이기 때문에 유화를 임신시킨 일광[日光]은 해모수라고 볼 수 있고, 그래서 해모수가 주몽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 아마 <구삼국사> 편찬자들도 그렇게 생각한 듯하다. 해모수 신화를 주몽신화의 앞부분에 배치한 이유이다.

그런데 해[일광]와 해모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해는 자연신이지만, 해모수는 인격신이다. 자연신 단계와 인격신 단계는 신화의 세계관에서 성격 차이가 있다. 상대적으로 인격신이 후대에 나타나게 마련이다. 즉 해모수 신화는 일광 감응의 성격을 갖는 주몽신화보다는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즉 지난 회에 살펴본 장수왕대에 유통되었던 <위서> 고려전의 주몽신화가 원형에 보다 가까운 형태라면, 이 주몽신화와 해모수 신화가 결합된 시기는 그보다 후대일 것이다. 그때 주몽신화의 원형에 해모수 신화를 추가하면서 주몽을 해모수의 아들로 바꾸지 않고, 원형에다 해모수 신화를 기계적으로 덧붙인 형태로 구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구삼국사>의 주몽신화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광개토왕비문에 주몽(추모왕)은 '천제의 아들[天帝之子]'을 자처하였다. <위서> 고려전 주몽신화의 '일자(日子)'도 같은 뜻이다. 그런데 위 해모수 신화에서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임을 자처하고 있다.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라면 '천제의 손자[天帝之孫]'가 되어야 한다. 실제로 <구삼국사> 기사에서는 주몽이 강을 건널 때 스스로 '天帝之孫'이라고 자처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이 주몽신화에 해모수 신화가 덧붙여진 뒤에 고구려인들에 의해 바뀐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혹은 <구삼국사> 편찬자들이 주몽이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아들이기 때문에 주몽을 '천제의 손자'로 바꾸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어쨌든 이런 점에서도 '천제의 아들'이라고 표현된 <광개토왕비>의 전승이 먼저이고, 해모수가 등장하는 <구삼국사>의 전승이 나중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구삼국사>나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해부루-금와왕 설화는 언제 주몽신화에 추가된 것일까? 이 설화 역시 해모수 신화와 마찬가지로 장수왕대 이후 어느 시점에 덧붙여졌을 것이다. 해부루-금와왕 설화와 해모수 신화는 그 계통이나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주몽신화의 일부를 구성하는 시점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용상 유화를 매개로 해모수 신화와 금와왕 설화가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건국신화는 단지 건국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다. 건국 이후 국가적 발전 과정에서 다양한 요소가 추가되고 변형되면서 더 풍부한 내용으로 확장되게 마련이다. 건국신화는 왕실의 신성한 권위를 상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지속적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에도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도 한동안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를 놓고 뜨거운 논란을 벌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혹 이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을 역사적 '신화'로 바꾸어놓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반성할 일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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