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라는 예술

최초입력 2022.05.16 16:14:58
최종수정 2022.05.17 09:21:11


떠나는 일도 노력이다. 굳이 먼데 가는 일, 아무리 멋진 일들이 기다린다 해도 내 시간과 마음이 들어가는 귀한 일이다. 떠나지 못할 이유는 늘 백가지이고, 그것들이 우리의 발목을 친친 감고 있거든. 그래서 때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먼 길 떠나 당신에게 갈 수 있어야지. 새벽같이 부산행 기차를 탔다. 아트 부산 행사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림들 좀 보겠다고 투지를 불태운 건 아니다. 예술 애호가라는 허울좋은 극성도 아니다. 5월의 세상 속으로 잠시나마 떠나는 일, 그 자체가 필요했던거니까.

아트부산은 첫날 VIP오프닝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뜨거운 예술에의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외국 화랑들에서도 많이 참석하여 볼거리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대형 행사에서는 심도 깊게 작품을 볼 수가 없다. 좋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와 있으니 하나의 작품에 집중하기 너무 어렵지. 직관적으로 눈에 띄는 것만 보게 된다. 강렬한 노을 속 당신의 뒷모습이라거나 아득히 멀어진 누군가의 얼굴처럼. 나의 취향을 발견하긴 쉬우나 느리게 걸으며 응시할 분위기는 아니다. 이 근사하고 멋진 예술 안에서 조급한 마음이 들자 발걸음이 무거워지더니 그만 앉아 쉬고 싶다.

굳이 먼데로 다시 가보기로 한다. 부산 기장의 청광 다실. 탁월한 감각의 독특한 공간이 있다하여 주저하지 않고 나섰다. 도착하는 순간부터 감탄이 터졌다. 오래된 빌라를 고쳐 청광 빌라라는 독특한 타운 하우스를 만들었는데, 그 공간들이 그야말로 예술이다. 그냥 예술이 아닌 섬세와 다정이 곳곳에 깃든 공간. 탁자에 무심한 듯 꽂아 둔 작약 꽃가지도 보는 이를 위한 최선의 배려다. 보시기에 좋으라고, 마음에 들어가라고, 어룽거리는 꽃그림자처럼 웃으시라고. 눈이 맑아지고 입이 벙싯해져. 그 곳 청광다실에선 모두 그리 될 수 밖에 없다. 모든 물성에 깃든 정성 덕분에.

공간은 사람이다. 청광을 가꾼 이숙희 대표님은 남다른 포스의 일상 철학자. 나는 철학이 멀리 있다 생각지 않는다. 그가 있는 공간, 그가 하는 요리, 그가 하는 한마디,  평범한 일상에서 드러나는 사유가 진짜 철학이라 여긴다. 다실은 5월의 초록이 통창 가득했다. 정갈한 찻잔에 맑은 차가 마르지 않았다.

ㅡ내가 대접받고 싶은만큼, 딱 그만큼 대접해 드립니다. 이렇게 먼데를 와주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겁니까. 그 귀한 시간, 귀한 마음을 내는 일인데요.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졌다. 나 이토록 귀한 사람이구나 심지가 단단해졌다. 청광다실 곳곳을 속속들이 누렸다. 아름다운 공간에, 꼭 있어야 할 자리에 그림들이 기다렸다. 차를 마시며 혹은 가만히 멈춰서 응시하고 음미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 함휘의 작품들이었는데, 색감과 구성이 놀라웠다. 이 젊은 작가 안에 혼재하고 있을 아픔, 불안, 고독, 환희, 사랑 등 자기 심연의 이야기를 길어올렸다. 자신을 오래, 깊이 들여다보는 일은 용기다. 내면의 어둠을 껴안아 나를 긍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한다. 청광다실에 걸린 작품들 앞에서 아트 부산을 까맣게 잊었다. 역시 예술 앞에선 느리게, 천천히 걸어야만 해. 청광다실의 모든 것이 예술이다. 특히 5월의 푸르디푸른 창이 다한다. 가만히, 오래 앉아서 초록의 창을 응시하노라니 내가 나무가 되는 것 같다. 세상의 햇살과 바람에 기분좋게 흔들리는, 누군가에게 시원한 그늘도 내어주는, 뿌리 튼튼한 나무가 되는 것 같다. 5월로 떠나오길 정말 잘했어. 도처가 예술인 걸.



임지영 우버객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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