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은 사람

최초입력 2022.05.18 13:47:52
최종수정 2022.05.19 09:30:31

김중백 작품



거대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 신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생을 이끌어주는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있다고 믿는다. 지금의 내 생을 여기로 이끈 것도 순전히 운이었다. 나 좋아서 그림 속에 살았고, 오래도록 응시했고, 잊기 싫어서 기록한 것 뿐이다. 나 좋아서 한 일들이 어느 시간, 누군가를 만나자 책이 되었고 강좌가 되었고 또 다른 기회들이 됐다.
그러니 운 이야기 운운할 밖에. 나를 이끌어 우리를 만나게 하는 놀라운 운의 작용 앞에 가만히 조아려 감사할 밖에. 세상의 모든 우연은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던거라 겸허할 밖에.

아트 부산에 다녀왔다. 국내외 갤러리들이 성황이었는데 흡사 그림 정글을 헤매는 기분이었지. 너무 화려한 각양각색 덤불 속에 길을 잃을 것만 같아서 눈에 들어오는 그림에만 집중했다. 그 때였다. 나를 부르는 그림을 만난 것은. '야리라거 갤러리'라는 해외 갤러리 부스였는데 우뚝 멈춰 그림의 이야기에 귀기울였다. 당연히 외국 작가일거라 생각했다. 커다란 캔버스 가득한 자유, 한껏 드러냈다가 또 사라졌다가.

ㅡ나는 바람이예요. 나는 자유예요. 나는 기도예요.

그림이 말했다. 나는 끄덕이며 그림에 더 다가갔지. 그림 속 자유는 희고 또 검다. 모든 색으로부터 떠남과 동시에 모든 색을 껴안는다. 존재에 자신있는 사람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속 자유한 바람에 가만히 올라탔다. 아주 잠깐이지만 먼 데로 데려가는 강렬한 에너지. 오랜만이다, 이런 느낌은.

놀랍게도 외국 작가가 아니었다. 김중백 작가였다. 우리나라 작가라니, 이런 표현이 가능하단 말이야? 더 놀랍게도 아트 부산에서 인연이 되어 바로 제주 출장길에 다시 만났다. 이러니 우리의 생에 거대한 힘의 자장이 있다고, 나의 손을 잡고 있는 커다란 존재가 있다고 믿을 수 밖에. 그 손이 이끄는대로 나는 맡겼을 뿐, 그러다보니 김중백 작가의 작업실 앞이네. 제주 선흘의 작업실에서 그를 맞닥뜨리는 순간, 내가 왜 그의 작품에 매료됐는지 알았다. 그는 그림 자체였다. 작가들은 영혼의 모서리를 떼어 반죽하고 으깨어 색을 만든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쩌면 모두 아프고 기꺼이 그 운명을 감내하는 것이지.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넘어서버리면, 우리의 삶은 과정이 곧 결과라는 것을 알아버리면, 작가는 한없이 가벼워진다. 그림은 끝없이 자유로워지고. 지금 여기, 김중백 작가처럼.

ㅡ저는 아무 것도 의도하지 않아요.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 그림은 지우는 게 그리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과장 된 철학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를 말할 뿐, 아무런 과장도 허위도 없다. 그의 인생을 쭉 듣는데, 그의 그림을 볼 때와 비슷한 상태를 경험했다. 잠깐 그를 따라 뉴욕의 어린 날들로, 인도의 젊은 날들로, 운명같은 사랑의 날들로 바람처럼 다니다가 수행과도 같은 지금 부모의 시간에 다다르기까지.

ㅡ단 한번도 목표를 정하고 살아오지 않았어요. 매순간 자유롭게 살았으니까요. 대신 저의 부모님, 집사람이 너무 힘들었겠죠. 그래서 이제는 열심히 살려고요.

김중백 작가는 해맑게 웃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노마드의 웃음이다. 이 자유로운 영혼이, 이 가없는 생의 방랑자가 지금 이 좁은 작업실이 힘들지 않은지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그의 평생을, 자유를, 영성을 오롯이 그림에 쏟아붓고 있구나, 내려놓고 있구나 느껴졌다. 그래서 그림을 지우고 있다 표현한 것이겠지.

ㅡ제가 정말 운이 좋아요. 저 혼자서 한 게 하나도 없어요. 지워도 지워도 젯소를 뚫고 나오는 커피 염색처럼, 그림도 자기가 스스로 작품이 돼요.

캔버스를 커피로 염색하고 그 위를 덮는 작품 이야기를 하며 그가 운 이야기를 했다. 그가 운 좋다는데 깊이 공감한다. 해맑은 사람은 해맑음을 지켜준 누군가가 곁에 있거든. 그런데 그 운 좋은 이, 사랑받아 마땅한 것도 사실인 걸. 대단히 아름답고 탁월한 사람인 것도. 그는 처음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인사했다. 나마스떼. 상대를 향한, 세상을 향한, 우주를 향한 진심의 존중. 그래서일까, 처음 만나 짧은 시간 함께 했을 뿐인데도 친구가 된 것 같다. 언제 어디서라도 다시 만날 것 같다. 전시를 기획해 준 야리라거 갤러리의 야리라거와도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어 여기까지 왔다며, 오늘 나를 만난 것 또한 기적이 아니겠냐며, 다시 손을 모은다. 그의 마음은 기도같다. 그림도 기도같다. 어쩌면 우리 삶도 기도일테다. 좋은 운은 전염성이 강하다. 끝까지 운 이야기다. 김중백 작가의 좋은 에너지가 아주 멀리, 아주 오래 퍼져가기를 바란다. 그림 속 깊고 따뜻한 기도가 당신에게 닿기를...

김중백 작품



임지영 우버객원칼럼니스트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